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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매(2003-09-04 11:50:00, Hit : 3011, Vote : 193
 칸트의 미적판단론>한신대 학사논문

Ⅰ. 머리말

아름다움을 사랑할 수 있고 이러한 감정을 자신의 고유한 축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美學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렇게 불리워지기 시작했지만- 기원전 5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美學史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문제는 ‘美란 무엇인가?’, 즉 미의 정의의 문제와 ‘우리는 美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미를 판정하는 능력으로서의 趣味(Geschmack)론이 17, 8세기에 미학의 중요한 논쟁적인 개념으로 등장하였다. 플라톤이래 서구 사상사에 있어서 미적 가치는 일반적으로 도덕적 善, 또는 과학적 眞理의 가치와 동일시되는 것이었다. 그러하던 미적 차원이 적극적인 의미를 띠며 하나의 독자적인 자율영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Immanuel Kant(1724-1804)의 ꡔ判斷力 批判ꡕ(1790)에 의해서이다.
철학자로서 칸트는 근대철학의 커다란 두 흐름인 경험론과 합리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근대철학을 완성시킨 사람이다. 따라서 칸트는 철학사에 있어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실제로 ‘美的 判斷力 批判’에서 미적 판단을 도덕적 판단이나 인식적 판단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분짓고 그것에 독자적인 철학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미적 자율성의 원리를 확립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바탕으로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사상가들의 미학적 반성들을 비판적으로 검토 수용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칸트는 미적 범주를 독자적인 영역으로 확보하고, 미학 이론을 한 철학체계의 전체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부분으로 올려놓은 최초의 철학자였다.먼로 C. 비어슬리, 『미학사』, 242쪽, 이성훈, 안원현 역,이론과 실천, 1987
따라서 그의 미 이론은 자신의 철학체계에서도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것을 담고 있는 것이 제 3비판서인 ꡔ판단력 비판ꡕ이다. 판단력은 이론 이성(悟性)과 실천이성(理性)의 중간에 위치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우리의 마음(의 능력)에는 세가지 양식, 즉 인식능력인 悟性과 욕구능력, 감정(쾌 또는 불쾌에 대한)에 대한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다음과 같이 구별짓고 있다. (칸트, 『판단력 비판』, 53쪽, 이석윤 역, 박영사, 1989)
心意의 전능력
인식능력
선천적 원리
적용범위
인식능력
오성
합법칙성
자연
쾌, 불쾌의 감정
판단력
합목적성
예술
욕구능력
이성
궁극목적
자유

그리고 일반적으로 판단력은 오성과 이성의 두 능력의 연관을 매개한다. 즉 판단력은 심연으로 가로막혀있는 두 영역, 즉 悟性이 지배하는 자연개념의 영역으로부터 理性이 지배하는 자유개념의 영역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같은 책, 52쪽 참조
ꡔ판단력 비판ꡕ에서 칸트는 이전의 두 비판서에서 수립한 자연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의 일치성 혹은 연속성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철학적 구도를 완성시키고자 한다. 따라서 ꡔ판단력 비판ꡕ은 선험적 비판철학의 체계적 완성이라는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칸트의 철학체계 속에서 ꡔ판단력 비판ꡕ이 어떠한 위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하는 철학적 관점을 견지한 채, 그의 미학 이론이 담고 있는 의의를 규명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본 논문은 들어가는 말과 맺는 말을 제외하고 네 장의 본문으로 구성되어있다. Ⅱ장과 Ⅲ장은 본론의 도입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Ⅱ장에서는 칸트에 의해 미적 차원이 자율적인 영역으로 확립되기까지의 사적 배경으로써 칸트 미학이론의 성립배경을 다룰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사적으로는 산업혁명을 토대로 중세의 봉건적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자본주의의 질서를 수립한 시민계급의 태동과정과, 또한 사상사적으로는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제시된 근대 휴머니즘의 세계관적 이념-즉 자유, 평등,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고, 결국 이러한 것들은 미적 차원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획득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Ⅲ장에서는 그의 전 철학 체계 내에서의 ꡔ판단력 비판ꡕ의 의미를 살펴보고, Ⅳ장에서는 판단력에 대한 고찰을 다루었으며, Ⅴ장에서는 ‘미적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칸트의 미학 이론을 최대한 충실하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맺는 말에서는 소박하나마 논자의 칸트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현대 미학에 던지는 그의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논자는 우선 칸트의 미학사상을 ꡔ판단력 비판ꡕ의 제 1부 ‘미적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데 충실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의도에서 인용문의 많은 부분을 ꡔ판단력 비판ꡕ에서 취하고자 하였다.


Ⅱ. 칸트 美學 理論의 성립배경


1. 社會的 배경 - 18세기 후반의 독일적 상황

서양사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17, 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 칸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계몽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의 파악에 의하면, 계몽주의 시대란 “모든 것이 비판에 붙여져야 하는 진정으로 비판적 시대”이며, 이제 “이성은 자신의 자유롭고 공명정대한 검토에 배겨 낸 내용에 대해서만 거짓 없는 존경을 허용하는 것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21쪽, 최재희 역, 박영사, 1994) 이로부터 우리는 칸트의 철학하는 자세와 방법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향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특칭되어지며, 18세기는 그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계몽(Aufklarung)”이란 칸트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된 말이면서 동시에 칸트는 계몽주의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미학은 18세기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계몽주의는 근대 시민계급이 정치적으로 성숙해가는 기초 단계로서, 시민계급의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몽주의 정신이 프랑스나 영국과는 달리 18세기 후반의 독일에서는 철저히 발전되지 못한 채 추상적인 이념으로 변했다.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17, 8세기에 이미 시민혁명이 성취되고, 시민계급은 스스로의 계급적인 상황을 의식하면서 계몽주의가 성취한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 독일에서는 계몽주의의 정신을 밑받침하는 합리적 사고가 대학의 그늘 속으로 후퇴해서 상아탑 속에 안주하게 되었다. 독일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계몽정신을 그 당시에 철저하게 획득하지 못하고 후에도 그것을 만회할 수 없었던 데에 기인한다. 독일 시민계급은 중세 이후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17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상실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문화적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옮겨가면서 독일 도시들의 쇠퇴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시민계급의 쇠퇴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강대석, 『미학의 기초와 그 이론의 변천』, 119-120쪽, 서광사, 1984

한편 정치적으로 당대의 독일은 수많은 분할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는 가운데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며 각 공국은 어느정도 독자적인 통치방식과 취미와 행동양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단일체제 정치형태에로의 전망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무엇보다도 절실한 것이었으며, 그런 만큼 동시대의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현안문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또한 언어상에 있어서도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독일어보다는 프랑스어나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모국어에 대한 상대적 소원감을 조장시켜 이런 정치적 분극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독일에 있어서의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의 과정은, 비록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사회적 불평등이나 노동의 분화로 인한 사회계층의 분열, 직업의 전문화 현상을 초래시켜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종교적 대립양상은 이러한 사회적 긴장관계를 더욱더 가속화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현실에 결코 둔감할 수 없었던 칸트를 비롯한 당대의 부르조아 지식인들은 무엇보다도 ‘분열’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해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독일의 특수한 절대주의의 체제하에서, 특히 귀족계층과 부르조아계급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 영국의 경험주의 지식인 계층은 귀족계층과 타협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실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 과격한 대립양상은 나타내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부르조아 지식인 계층은 귀족계층과 비타협적으로 대립함으로써 결국 과격한 시민혁명(1789, 프랑스혁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에 비해 현실적으로 무기력했던 독일의 부르조아 지식인들은 지배귀족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함으로써 관념적으로, 즉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로 빠지게 되었다.
로 말미암아 어떠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과적으로 칸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 미학은 사변적 관념론의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칸트의 미학 이론은 궁극적인 차원에서 초기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와 끊임없는 정치적, 종교적 분열상태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써 “공통감”을 바탕으로 공동체적인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지향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즉, 上記한 독일의 사회적 현실의 모순성에 대한 명백한 의식의 반영물로서 고찰될 수 있다는 사회적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2. 思想史的 배경 - 영국의 경험주의와 독일의 합리주의

본 장에서는 칸트의 미학 이론을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하여 칸트 미학 이론이 성립하게 된 배경을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전통과 연관하여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미학의 시작을 알리는 객관적 미의 이론으로부터 주관적 미의 이론으로의 전환은, 주로 과학의 발전과 병행된 경험주의 철학의 대두, 그리고 예술가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낭만적 태도의 동향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오병남, ‘美 ; 그 말과 개념과 이론’, 203쪽, 『철학연구』 제20집, 철학연구회, 1985
미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이다.
18세기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미적 판단을 느낀 快 위에 근거지우며, 우리가 오늘날 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快 또는 不快를 수반하여 세계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습관에 대한 폭넓은 연구중의 한 부분으로 취급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미학에 관해 사람들이 쾌 또는 불쾌를 느끼는 경우의 사례들을 경험적으로 수집, 분석하는 것으로써 충분한 연구분야라고 생각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미학사상은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면을 갖고 있다. 이들의 미학사상의 특징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내적 감각” 이것은 우리의 신체가 갖고 있는 외적 감각과는 다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내적 감각이다.
으로서의 취미를 상정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취미가 사람들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광범위한 경험적 통일성과 일치점들을 고찰함으로써 훌륭한 “취미의 기준-즉,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이상적인 미적 성격-”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전자는 주로 샤프츠베리(Shaftesbury, 1671-1713)와 허치슨(Hutcheson, 1694-1746), 그리고 후자는 버크 (Burke, 1728-1797)와 흄(Hume, 1711-1776)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샤프츠베리는 다른 종류의 쾌와 구별하여 미적 쾌를 “美的 無關心性” 내지는 “無關心的 快”로 규정하는 바, 이러한 ‘無關心性’은 칸트에 의해 체계화된다.
미적 무관심성을 주장한 점에서 영국 경험주의의 취미론과 칸트의 취미론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취미의 기준을 발견하려는 영국 경험주의자들은 칸트와 다음의 두 가지 면에서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오병남, ‘미적 태도론의 성립과 현대미학의 문제’ 54쪽, 『미학』 제6집, 한국미학회, 1979
: 첫째, 칸트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취미 판단의 유일하며 궁극적인 근거는 오로지 그것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쾌의 감정이다. 따라서 칸트의 취미론은 미를 판단하는 취미의 기준을 구하고자 했던 영국의 취미론과는 구별된다. 둘째, 칸트의 취미론은 취미 판단은 어느것이나 선천적인 기초를 갖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심리학적 탐구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들의 취미론과 구별되는 것이다.
흄과 버크는 취미의 기준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그러한 기준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보이지만, 그 기준이란 곧 다양성 속의 통일성, 또한 표현의 호소력과 같이 대상이 지닌 특정한 성질과 특성이 정상적인 관조자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경험적인 일반화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들에게는 분명히 취미의 기준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게 경험적으로 추출된 기준들이 어떤 것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개인적인 주장에 대한 객관적인 토대를 알 수는 없다는 근거에서 그러한 주장의 적합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칸트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핵심을 이루게 된다. 즉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하는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을 나는 무슨 권리로 상정할 수 있는가? 칸트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름답다’라는 말의 뜻이 지닌 의미 중 일부는 바로 다른 사람의 동의를 요구한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의미란 바로 다른 사람들도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요구 또는 의미 함축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자신이 특정한 경우에 어떤 감정을 느꼈노라고 보고하는 것 이상의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칸트는 이러한 물음을 던짐으로써 미적 판단의 분석을 시도하는 바, 이것은 당시의 취미 이론을 본질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를 여타의 미학 이론에 관한 철학자들과 근본적으로 구분짓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영국 경험주의자들이 미의 문제를 취미라는 내적 감각을 상정함으로써 이에 대한 경험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데 반해, 독일 합리주의자들은 취미의 문제보다는 주로 취미 판단의 인식적인 지위를 확립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이들은 데카르트의 전통에 따르고 있으나 사실 미학에는 거의 공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에 이르러 데카르트의 철학은 예술분야에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김문환, 『근대 미학 연구(Ⅰ)』, 63쪽, 서울대 출판부, 1986
합리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전통을 따라 모든 개념을 “명석, 판명(clear and distinct)”이라는 두 요소로 평가하였다. 데카르트는 감각기관과 몽상을 철저히 부정하였고, 그러한 理性의 우위로 인해 합리론에서 미학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학사의 개념들은 감각-지각의 영역 안에 놓이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움가르텐은 詩의 상상력으로도 우리에게 인식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학의 학명을 제시하게 되었다. 바움가르텐은 그동안 너무 좁게 구획된 論理學의 영역이 ‘감성적으로 파악 가능한 대상들’과의 연관을 통해 확대되어야 한다는 요청을 제기하였다. 그에 따라 학문의 체계를 Logica와 Aesthetica로 나누고 Logica를 명석, 판명한 개념(clear and distinct idea)들로 이루어진 고급인식능력에 대한 학으로, Aesthetica는 명석하지만 판명하지 않은 개념(clear but not distinct idea), 즉 혼란된(confused) 감성적 표상이라는 저급한 인식에 관한 학으로 구분하였다. 따라서 Aesthetica의 원래적 의미는 ‘감성적 인식의 학(science of sensitive conition)’이며, 저급한 인식의 학문으로써 논리학의 하위체계로 종속되었다.
이것을 이어받아 칸트는 바움가르텐이 Aesthetica를 논리학에 종속시켰던것을 비판하면서 칸트는 이성의 원리 하에서 미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하고 그것의 규칙을 과학에로 돌리려는 바움가르텐의 노력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칸트에 의하면 미적 판단은 논리적 일반화가 불가능하며, 그것들은 일반적인 규칙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영역인 것을 밝히고 미학에 독립된 학문적 체계를 부여했다. 이것이 바로 제 3비판서인 ꡔ판단력 비판ꡕ의 1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제 미는 心意(마음의 능력)의 三分法 각주 2 참조
과 연관되면서, 인식이나 욕망과는 다른 능력에 의해 파악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칸트의 미학이론에 영향을 준 두 가지의 철학적 경향들로 영국 경험주의와 독일 합리주의를 살펴보았다. 전자는 칸트의 저서들에서도 상당부분 수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후자는 칸트에게 주로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Ⅲ. 칸트 철학 체계 내에서의 ꡔ判斷力 批判ꡕ의 위치          


칸트 미학이론의 창의성은 당대의 배경적인 여러 미학사상들을 그의 철학 체계의 지평으로 끌어들은 그의 놀랄만한 건축술에 있다. 오병남, ‘칸트미학의 재평가’, 114쪽, 『미학』 제 14집, 한국미학회, 1989
따라서 그의 철학 체계 속에서 『판단력 비판』이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 하는, 이른바 그의 철학적 관점을 고찰해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그의 선험철학의 테두리 속에서 합리주의적 교조주의와 함께, 흄에서 결정화된 경험주의적 회의주의를 아울러 교정하려 하였고, 이를 통해 다른 것과 함께 취미 판단의 선험적인 상호주관성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그의 『순수 이성 비판』(초판 1781년, 재판 1787년)과 마찬가지로 『판단력 비판』은 선험철학의 일반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즉 칸트의 관심은, 선험적 종합판단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한 특정한 심성작용이 과연 인간의 의식과 경험이 갖는 좀더 일반적인 특징들이 부여된 모종의 필연적인 것으로 연역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놓여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선천적인 종합판단들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그의 철학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칸트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이성적 존재로서의)인간은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이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탐구해야 할 점을 칸트는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하고 있다. 즉, ①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②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③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이다. 칸트, 『순수 이성 비판』, 555쪽 참조, 최재희 역, 박영사, 1994
첫번째 물음은 순수 이성 비판의 기초 이론에서 다루어지며, 나머지 두 물음은 실천 이성의 관할영역에 속한다.
이 세 물음을 통해 밝히고자 한 것이 바로 인간 이성에게 허용되는 지식, 행위, 희망의 가능근거와 범위이며 이것을 위한 작업이 ‘인간 이성의 비판’이다. 인간 이성에는 있는 것을 그대로 표상하고 관조하는 능력과, 있는 것을 극복하거나 있지 않은 것을 있도록 만드는 실천 능력, 그리고 개별적으로 주어지는 특수한 사례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통일적 원리를 생각해내는 능력이 있다. 이 세 가지 면은 각각 ‘이론적 이성’, ‘실천적 이성’, ‘반성적 판단력’과 연관되어진다. 그리고 이 각각의 면에서의 이성의 대표적인 가치적 활동을 각각 인식작용, 도덕행위, 합목적적 판단이라고 본다.칸트, 『판단력 비판』, 29쪽 참조, 이석윤 역, 박영사, 1989
그러므로 칸트에게서 ‘이성 비판’이란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마땅히 행해야만 할 것과 행해서는 안 될 것, 합당하게 희망해도 좋은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분간해 내는 일’이다. 이것은 바로 이성 자신이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작업을 의미하며, 이 때 한계 규정되는 이성은 ‘순수한’ ‘순수한’ 것이란, 여기서의 이성의 한계 규정 작업이 철학적 작업이고, 철학적 작업의 대상은 ‘이성이 그 자체로서, 즉 어떠한 감각적 경험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카울바하, 『칸트 비판 철학의 형성과정과 체계』, 327쪽, 백종현 역, 서광사, 1992)
이성이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는 세계를 서로 구별되는 두 영역으로 양분해 놓고 있다. 한편으로 그는 우리에게 감성에 의해 감지할 수 있고 오성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물리적인 세계, 즉 시공의 현상계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할 수는 없지만 사유는 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인 세계, 즉 物自體(Ding an sich)의 거처인 초감성적인 본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현상계가 섬이라면 본체계는 바다와 같다. ‘물자체의 인식불가능성’은 현상계와 본체계의 어쩔 수 없는 깊은 심연을 전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현상적 영역은 과학의 영토를 구성하고 필연성에 기초한 이론이성에 의해 지배된다. 이에 비해 사물들 자체의 세계인 본체적 영역은 웅대한 도덕성의 천국으로서 자유에 근거한 실천이성-의지-에 의해 통치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실천 이성 비판』(1788)에서 칸트는 제 1비판에서 윤곽을 그렸던 도덕적인 세계를 실체화시키고자 하며 『순수 이성 비판』에서의 불가해한 문제들을 해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도덕성의 근본원리로부터 출발한다. 이로부터 칸트는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성, 신의 존재 등 도덕법칙의 세 공리를 확립하고 있다. 실천이성의 영역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 문제이다. 당위란 오직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의지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을 “실천적”이라고 부른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자연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와의 일치성, 혹은 연속성을 수립함으로써 그의 철학적 구도를 완성시키고자 기도하고 있다. 그래서 제 3비판은 과학의 영역과 형이상학의 영역, 필연과 자유, 현상과 본체간의 교량을 제공할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판단력이 중심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쾌와 불쾌의 감정이 인식능력과 욕구능력의 중간에 있는 것처럼, 판단력은 오성과 이성의 중간에 있는 능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비판서 각각에서 칸트는 우리의 인식 주장, 도덕 판단, 그리고 취미 판단이 어떻게 개인적인 타당성 이상의 것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만일 개인적인 타당성이 그 전부라고 한다면,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내면 상태에 관계된 위장된 보고들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적인 물음은 이러한 판단들이 어덯게 객관적일 수 있으며, 또 그것들은 어떤 종류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관계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의 도덕 판단 및 미적 판단이 단순히 ‘내게만 옳은’ 것-즉 단순한 주관적인 보고-이 아니라는 것을 무엇을 근거로 해서 알 수 있는가를 명백히 밝히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의 미학 이론에서 칸트는 쾌 또는 불쾌의 감정에 바탕을 둔 하나의 판단이 동시에 어떻게 보편타당하다고-즉 만인에게 타당하다고- 합법적으로 주장될 수 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주관-객관의 이분법을 분쇄하고자 노력한다. 그의 방법에는 그가 미적 경험 및 판단의 사실들이라고 여기는 어떤 것을 보증하기 위해 필요한 원리들에 대한 탐구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미학적 술어들과 개념들의 철저한 분석까지도 포함된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으로 세 개의 비판서들은 그 방법론과 내용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다. D. W. 크로포드, 『칸트 미학 이론』, 35-36쪽 참조, 김문환 역, 서광사, 1995



Ⅳ. 悟性과 理性의 매개로서의 判斷力


칸트는 이전의 두 비판서가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영역, 즉 인과성의 현상계, 예지적인 자유의 초감성적 본체계를 확립했기 때문에, 그의 철학 체계의 완성을 위해서는 그것들을 매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매개를 통한 두 영역들간의 통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과제를 『판단력 비판』에 부여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는 『판단력 비판』을 “철학의 두 부문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하는 수단” 칸트, 『판단력 비판』, 서론 Ⅲ의 제목, 이석윤 역, 박영사, 1989
으로 간주하였다.

모든 심적 능력 또는 역량은 하나의 공통적인 근거로부터는 더 이상 도출될 수 없는 세 가지의 능력 즉 인식능력, 쾌 또는 불쾌의 감정, 욕망능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 ........ 그런데 오성과 이성 사이에 판단력이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능력과 욕망능력 사이에는 쾌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판단력도 (오성이나 이성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만으로서 선천적인 원리를 포함하고 있으리라는 것과, 또 욕망 능력에는 필연적으로 쾌 혹은 불쾌가 결부되어 있으므로 ........판단력도 그 논리적 사용에 있어서 오성으로부터 이성에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수인식능력으로부터, 즉 자연 개념의 영역으로부터 자유개념의 영역에로의 이행을 실현하리라고 하는 것이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예상될 수 있는 일이다. 같은 책, 29-31쪽


따라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이 다루어야 할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진술해 놓고 있다.

오성과 이성의 중간항을 이루고 있는 이 판단력이 과연 그 자신만으로서 선천적인 원리들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가, 그 원리는 구성적인가, 아니면 단순히 통제적인가 (따라서 고유한 영역을 나타내지 않는가), 그리고 또 판단력은 인식능력과 욕망능력의 중간항으로서의 쾌, 불쾌의 감정에 대해서 (오성은 인식능력에 대해, 그리고 이성은 욕망능력에 대해 선천적으로 법칙을 지정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규칙을 부여하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 바로 『판단력 비판』이 다루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같은 책, 18쪽


그런데 이 판단력에는 두가지가 있다.  

판단력 일반은 특수자를 보편자 아래에 포섭시켜 사유하는 능력이다. 보편자(규칙, 법칙, 원리)가 주어져 있는 경우 특수자를 이 보편자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 규정적이다. 그러나 오직 특수자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이 특수에 대하여 보편자를 찾아내야 할 경우의 그 판단력은 단지 반성적일 따름이다. 같은 책, 31쪽


이어서 칸트는 자연에서건 예술에서건 한 대상을 그 미에 관련하여 판단할 때 판단력은 반성적 능력에서 구사된다고 주장한다. 특수한 현상의 개별성과 특수한 경험적 법칙을 통일적 고찰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서는 反省(Reflexion)속에서 그 원리를 발견할 수 밖에 없다. 이 생각은 범주에 의해서 근거지워진 합법칙성의 개념을 넘어서서 목적에 대한 자연의 질서에로 나아간다. 하나의 사물이 목적에 따라서 가능한 사물들의 성질과 합치하면, 그것은 그 사물들의 형식의 ‘합목적성’이라고 불리우므로, 판단력의 원리는 경험적 법칙들 일반 아래에 있는 자연의 사물들의 형식에 대한 다양한 자연의 합목적성이다. 이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이 바로 자연으로부터 자유에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리고 이 합목적성의 원리는 판단력에 있어서 마치 객관적 원리인 것처럼 필연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판단력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는 것이 칸트의 제 3비판서인 바, 그것은 미적 판단력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의 2부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판단력은 모두 반성적 판단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또한 쾌가 합목적성의 지각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판단력의 비판을 이처럼 구분하는 것은, 미적 판단력은 형식적 합목적성(또는 주관적 합목적성이라고 불리어지는)을 쾌, 불쾌의 감정에 의하여 판정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목적론적 판단력은 자연의 실재적 합목적성(객관적 합목적성)을 오성과 이성에 의하여 판정하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적 판단력은 사물들을 개념에 따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에 따라 판정하는 특수한 능력이다. 이에 비해 목적론적 판단력은 특수한 능력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론적 인식에 있어서와 같이, 개념에 따라 활동은 하지만 자연의 어떤 대상들에 관해서는 특수한 원리들, 즉 객체를 규정하지 않는, 단지 반성적인 판단력의 원리들에 따라 활동하는 한에 있어서 단지 반성적 판단력 일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목적론적 판단력은 그 적용에서 보면 철학의 이론적 부문에 속한다. 그리고 理說에 있어서의 원리는 규정적이어야만 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규정적이 아닌 특수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이 판단력은 또한 비판의 특수한 부문을 구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에 반해서 미적 판단력은 그의 대상들의 인식에는 아무 것도 기여하는 바가 없으며, 따라서 인식능력들이 선천적 원리-이 원리가 어떻게 사용되든(이론적으로 사용되든 실천적으로 사용되든)-를 가질 수 있는 한에 있어서, 단지 판단하는 주관과 주관의 인식능력들과의 비판에만, 즉 모든 철학의 예비학인 비판에만 귀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같은 책, 47-50쪽 참조

미적 판단에 있어서는 쾌의 감정이 곧 술어가 되고 그것은 대상의 형식에 대한 단순한 반성에 의해 산출되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대상의 형식은 그것이 어떤 목적이나 개념의 매개 없이 관조하는 주관에 적합하게 될 때 합목적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미적 대상의 합목적성은 위의 인식능력들에 대한 대상의 형식의 적합성에 있게 된다. 한편 목적론적 판단의 경우에 있어서 술어가 되는 것은 목적 개념과의 관계이다. 이 경우 대상의 형식은 그 대상에 내재하는 목적에 적합할 때 합목적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칸트가 자연계와 도덕계 간의 매개적 고리를 발견했다고 믿은 것이 바로 위의 ‘합목적성’-즉, 미적 판단에 있어서는 형식적이고 주관적인 합목적성, 목적론적 판단에 있어서는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합목적성-의 개념에서이다. 칸트는 반성적 판단력이 실제로 그들간의 종합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자연의 합목적성이라는 판단력의 개념은 자연개념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인식능력들의 통제적 원리로서만 그것에 속한다. 그러나 이 개념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이나 예술)의 어떤 대상들에 관한 미적 판단이거니와 이 미적 판단은 쾌 또는 불쾌의 감정에 대해서는 구성적 원리인 것이다. 인식능력들의 조화가 이러한 쾌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 인식능력들의 유동에 있어서의 자발성은 동시에 도덕적 감정에 대한 마음의 감수성을 촉진함으로써 위의 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으로 하여금 자연개념의 영역과 자유개념의 영역을 그 결과에 있어서 연결하여 매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같은 책, 52쪽



Ⅴ. 美的 判斷力 批判의 주요문제


1. 趣味 判斷의 4가지 계기

취미 판단이란 단순히 어떤 개별적인 사물을 아름답다(또는 아름답지 않다)고 보는 판단이다. 칸트는 미의 내용과 관계되는 미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어떤 대상이 미적이라고 판단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과 더불어 그의 미학이론을 시작한다. 즉 판단 능력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취미 판단의 분석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분석은 그러한 판단들의 의미, 판단에서의 논리적인 의미 함축, 그리고 판단의 기저를 이루는 토대 또는 근거들에 대한 조사 등으로 다양하게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는 취미 판단을 반성적 판단의 분명한 예로 본다. 취미 판단에서 대상은 어떤 규정적 개념과 연관하여 판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형식에 대한 관조가 우리들 안에서 쾌 또는 불쾌의 감정을 산출해 내는가와 연관해서 판정될 뿐이다. 그럼에도 취미판단은 보편타당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경험 속에서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판단 능력의 기저에는 어떤 일반적인 선험적 원리가 존재하며 취미 판단의 분석은 따라서 판단력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비판의 열쇠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는 ‘美의 分析論’에서 미에 관한 판단으로서의 취미 판단을 -순수 이성 비판의 ‘선험적 분석론’에 있어서의 오성 개념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순수 이성 비판의 ‘선험적 분석론’에서의 오성개념에 대한 분석 순서(즉 분량, 성질, 관계, 양상)와는 달리 판단력 비판의 ‘미의 분석론’에서는 성질의 계기가 맨먼저 나온다. 이것은 미적 판단이 이 계기를 맨먼저 고려하는 까닭이라 한다. (같은 책 57쪽 참조)
- 네 가지 계기 즉 성질, 분량, 관계, 양상에 따라 차례로 분석 논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의 분석은 취미 판단의 분석이며, 이것은 취미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취미 판단의 제 1계기로서의 성질에 있어서 칸트는 “취미판단은 미적이다.” 같은 책, 제1절의 표제. 여기에서 ‘미적이다’라는 술어는 독일어의 Asthetik라는 형용사로서 원래는 ‘감성적’이라는 의미이며, 우리말로는 통상 ‘美感的’인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용어는 바움가르텐이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써 미학의 학명을 제시한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美를 가르켜 말할 때 쓰여진다. 따라서 필자는 개념의 혼돈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 그리고 편의상 우리에게 좀더 친숙한 ‘미적이다’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칸트가 이 술어 속에 어떤 의미를 담고자 했는지는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라는 언명으로 시작한다. 미적 판단이란 그 본성이 무엇이든지간에(즉 감각적이든, 미감적이든, 이성적이든간에) 판단에 있어서 표상들이 객체보다는 주체에 연관된 그러한 판단이다. 따라서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주관적 판단이다. 취미 판단은 표상을 주관과 그 주관의 쾌, 불쾌의 감정에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즉 판단은 표상이 판단을 통해서 주관(주관의 감정)에 관련되는 경우에, 또한 오로지 그러한 경우에만 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성질상 취미판단은 두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미적 판단의 부류는 논리적 판단의 부류와 구별된다. 논리적 판단은 한 대상에 대한 표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즉 그 대상의 속성이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주관 및 그것의 쾌 또는 불쾌의 감정에 대한 표상을 말한다. 그것은 그 규정 근거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판단”이다. 둘째, 대부분의 미적 판단은 단순히 쾌나 만족의 報告(‘이것은 유쾌하다‘, ‘이것은 즐겁다’ 등)이지만, 어떤 미적 판단은 취미 판단이다. 취미 판단은 “아름다운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라 정의된다. 같은 책, 57쪽
이 취미 판단의 두드러진 특징은 ‘무관심적’이라는 것이다. 취미 판단에 있어서 이 무관심성이라는 명제는 취미 판단들의 연역에 이르기까지 칸트의 전체적인 논증 전개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취미 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일체의 관심과 무관하다.” 같은 책, 제2절의 표제. 칸트의 이 무관심성은 경험론자들로부터 취하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관심이란 어떤 대상의 현존과 결합되어 있는 만족이며, 그것은 욕구능력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미에 대한 판단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섞여 있다면, 그 판단은 매우 편파적이고 또 순수한 취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취미의 문제에 있어서 심판관의 역할을 하려면, 우리는 사물들의 현존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끌려서는 안 되며, 이 점에 있어서 아주 냉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책, 59쪽


칸트는 우리가 취미 판단에서의 순수한 무관심적 쾌를 ‘관심과 결합되어 있는 것’과 대조시킬 때 가장 잘 해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세 가지 쾌, 즉 감각적인 쾌, 그 자체로서 좋은 것, 유용한 것과 구별되는 아름다움에서의 쾌를 특징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이 쾌, 불쾌의 감정에 대해 갖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취미 판단은 단순한 快適의 판단 및 善의 판단과 전적으로 다르다. 쾌적한 것과 선한 것, 양자는 모두 욕구능력에 관계하고 있으며, 그러는 한도 안에서 만족을 수반하게 된다. 이 세가지 경우에 있어 만족감은 각각 다르게 표현된다. 쾌적하다는 것은 어던 사람에게 쾌락을 주는 것을 말하고, 아름답다고 함은 그에게 단지 만족을 주는 것을 말하며, 선하다고 함은 존중되고 시인되는 것, 즉 어떤 객관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快適은 이성이 없는 동물에게도 타당하지만 美는 인간에게만, 즉 동물적 존재자이면서 이성적인 존재자인 인간에게만 타당하다. 그러나 善은 이성적 존재자 일반에게 타당하다. 만족의 이러한 세가지 종류 중에서 미에 관한 취미의 만족만이 유독 무관심적인 자유로운 만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취미 판단은 단지 觀照的이다. 즉 그것은 인식적 판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념들에 기초를 둔 것도 아니며 개념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취미란 어떤 대상 또는 어떤 표상방식을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만족 또는 불만족에 의해 판정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만족의 대상이 아름답다라고 일컬어진다.
칸트 미학 이론의 주춧돌을 형성하는 것은 위의 “취미 판단은 미적이다”와 “취미 판단은 무관심적이다”라는 두 개의 명제이다. 이 두 개의 명제들은 무관심적 쾌라는 개념 안에서 결합되는데, 칸트는 취미 판단들이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분량에 있어서 취미 판단은 (주관적)보편성을 갖는다. 미란 “개념을 떠나서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 같은 책, 78쪽
취미 판단에는 객체에 의거하는 보편성은 없지만 일체의 관심으로부터 떠났다고 하는 의식과 함께 모든 사람들에 대한 타당성의 요구가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취미판단에는 주관적 보편성에 대한 요구가 결부되어 있다. 상호개인적 타당성의 이 주장은 칸트에게 있어서 취미 판단의 결정적 징표가 되면서 또한 근본적으로는 제 3비판의 필연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선험적 물음은 ‘어떻게 그러한 판단들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내가 바라보고 있는 장미를 나는 취미 판단에 의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서 여러 개별적인 장미들을 비교함으로써 내려지는 판단, 즉 ‘장미들은 일반적으로 아름답다’라는 판단은 이미 단순히 미적으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 미적 판단에 기초를 둔 논리적 판단으로서 진술된 것이다. 그런데 ‘장미는 (향기가) 쾌적하다’라는 판단은 물론 미적 단칭 판단이기는 하지만, 취미 판단이 아니라 감관 판단이다. 왜냐하면 취미 판단은 보편성의 미적인 양 즉 모든 사람들에 대한 타당성이라는 양을 가지나, 쾌적한 것에 관한 판단에 있어서는 그러한 분량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감관 판단은 취미 판단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같은 책, 72-73쪽


그렇다면 순전히 주관적 향수에 의존하며 오성의 범주를 함유하지 않는 판단들이 어떻게 보편적 동의를 명령할 수 있는가? 보편적인 논리적 판단은 객관적 근거로 해서 이 속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 취미 판단은 주관적 양을 내포하며 직관에 즉각적으로 수반되는 단칭 판단으로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같은 형식을 갖는다. 쾌적한 것에 관한 판단도 단칭 판단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감관적 판단이며, 보편적인 미적 양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취미 판단 자체가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다. 취미 판단은 이러한 동의를 규칙의 한 사례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할 뿐이며, 이 사례에 관한 확증을 개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찬동’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적 만족,  즉 미의 향수의 동인을 찾아 보편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마음의 어떤 조건에까지 더듬어 올라갈 수 있거나,  그 조건에 근거지울 수 있는 것이라면, 그때 미의 판단에 있어서 보편성에 대한 주장은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인식-인식일반-과의 어떤 연관을 필요로 한다. 인식만이 보편적 전달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여러가지 인식능력들을 분류한 제 1비판의 결론들에 의존한다.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인식능력을 가지는 바, 이것은 두가지 능력, 즉 (잡다한 감각직관을 함께 모으는) 구상력과 (이 표상들을 개념에 의해 통일시키는) 오성간의 연결성을 필요로 한다. 특정한 인식행위는 특정한 표상과 특정한 개념간의 연결을 포함하며 이것은 앞의 두가지 인식능력들간의 기초적 조화를 전제한다. 이 능력들이 인식의 추구로 향하지 않을 때, 이것들은 감각직관이나 특정한 개념에 구속되거나 얽매이지 않고, 말하자면 양자간의 조화를 즐기면서 인식을 유희할 수 있다. 이때 인식일반과 관련맺고 있는 임의의 표상 속에서 표상력들의 자유로운 유희의 감정이 존재하는 어떤 마음의 상태가 생겨난다. 이 상태에서 마음은 그 두가지 인식능력들의 조화에서 강렬한 쾌나 만족을 얻는다. 이 쾌가 바로 美의 경험이다.
그런데 대상이나 대상을 주어지게끔 하는 대상의 표상에 대한 이러한 미적(주관적)인 판정은 대상에 관한 쾌감에 선행하며, 또 두 인식능력의 조화에 관한 쾌감의 근거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대상의 표상과 결부되어 있는 만족이 이러한 보편적인 주관적 타당성을 갖는 것은, 오로지 대상들을 판정하는 데 있어서의 주관적 조건들이 그와 같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미란 주관의 감정에 대한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취미 판단의 세번째 계기로서 논의되는 관계란 미를 목적의 관계에서 고찰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칸트는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그 특수한 무관심적이고 보편적으로 획득가능한 만족을 제공할 수 있게 해주는 질서원리에 대한 더 깊은 분석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칸트의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개념과 만나게 된다. 어떤 객체 혹은 어떤 심적 상태나 혹은 어떤 행위는 그 가능성이 반드시 어떤 목적의 표상을 전제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목적에 의한 하나의 인과성을, 다시 말하면 어떤 규칙의 표상에 따라 그 객체 내지 행위 등을 그처럼 정해놓은 하나의 의지를 그 근저에 상정할 경우에만 비로소 그 가능성이 우리에게 설명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다고 하는 이유만으로도, 그러한 객체 내지 행위는 합목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칸트는 취미 판단이 이 합목적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특정한 목적들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개념적이지 무관심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미적 만족을 주는 것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을 주어지게 하는 표상에 있어서의 합목적성의 한갖된 형식이다.” 같은 책, 79쪽

두가지 인식능력(구상력과 오성)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유희를 불러일으키는것은 다름 아닌 표상 내에서의 형식적 합목적성에 대한 경험이다. 즉 대상이 표상에 주어질때에 주관의 인식능력들의 유동에 있어서 성립하는 한갓 형식적 합목적성의 의식이 다름아닌 快이다. 이렇게 해서 대상의 형식은 두가지 인식능력의 조화와 선험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조화의 감정이 바로 무관심적(미적) 쾌 자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적 쾌는 감각적이지도, 지적이지도 않은 다른 종류의 것으로, 자극과 감동의 영향을 받지 않는 취미 판단이다. 따라서 단지 형식의 합목적성만을 그 규정근거로서 가지는 취미 판단이 곧 순수한 취미판단이다. 즉 미는 합목적성이 목적의 표상을 떠나서 어떤 대상에 있어서 지각되는 한에 있어서의 그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이다.

다음으로 취미 판단의 네번째 계기인 양상 혹은 양태는 必然性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즉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관해서 그것이 만족과 필연적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같은 책, 99쪽
  그런데 이 필연성은 範例的(혹은 예증적) 필연성이다. 이 필연성은 이론적, 객관적 필연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취미 판단을 내리는 그 누구도 다른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해 동의할 것임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실천적 필연성도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이성 의지의 개념에 의해 도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적 판단에 있어서의 이 필연성은, 문제되고 있는 그 대상에 대해 모든 사람이 마땅히 동의하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언명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취미 판단에 내포되어 있는 이 필연성은 만인에게 있는 ‘공통감’-“우리의 인식능력들의 자유로운 유희로부터 결과하는”마음의 상태 같은 책, 101쪽
-을 전제로 한다. 칸트에 의하면 이 공통감이란 인식 자체의 전달 가능성의 필요조건이며, 또한 회의론을 제외한 모든 철학적 탐구에 있어서 전제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통감의 전제하에서만 우리는 취미 판단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공통감은 일종의 당위를 내포하고 있는 판단의 정당성을 확립하려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판단과 ‘일치할 것’이라고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판단과 ‘합치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제 4계기로부터 추론되는 미란, 개념을 떠나서 필연적 만족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2. 美와 崇高

칸트는 ‘미적 판단력의 비판’을 다루는데 있어 미의 분석과 숭고의 분석을 구분하여 논의하고 있다. 그러면 칸트는 어떤 근거에서 미적 판단의 두 유형인 미와 숭고를 달리 구분하여 논의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미와 숭고는 두가지 점에서 공통적이다. 즉 양자는 모두 논리적 형식에 있어서 단칭적이고 그러면서도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미적 판단의 술어이다. 또한 그것들은 감각이나 오성의 특정개념에 의존하지 않는 쾌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미와 숭고는 두가지 측면에 있어서 서로 대조적이다. 즉 전자는 어떤 대상의 형식이나 유한성과 관게하는데 반해, 후자는 무한성의 경험을 포함한다. 그리고 전자는 대상의 합목적성에 의존하여 “그 대상이 우리의 판단력에 대해 이미 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반해, 후자는 마치 구상력에 대해 폭력적으로 보이는 대상들에 의해 환기된다.” 같은 책, 110쪽

자연은, 미의 감정과는 달리 그 혼돈과 복잡한 무질서와 황폐함에 있어서, 또한 그 크기와 위력에 있어서, 숭고의 이념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자연의 미에 대해서는 그 근거를 우리의 외부에서 찾아야 하지만, 숭고에 대해서는 다만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이를테면 자연의 표상에 숭고함의 감정을 불어넣는 우리의 ‘심적 태도’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적 태도로써, 숭고에 대한 우리의 체험은 그 근저에 도덕성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숭고의 감정이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러한 도덕성의 암시는 그의 철학 체계를 살펴볼 때에 미의 판정능력에서 숭고의 판정능력에로의 이행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논자는 숭고의 분석을 깊이 다루려 하지 않고 다만 숭고의 감정의 구분을 통해 얻어지는 숭고의 본질과 의미만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칸트는 숭고를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하며, 수학적 숭고는, 그것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것이 되는 “단적으로(절대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라고 부른다.” 같은 책, 112쪽
는 언명으로 시작된다. 숭고한 것의 현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고양감은, “온갖 감각적 척도를 뛰어넘는 정신의 능력” 같은 책, 122쪽 참조
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각성할 때 생기는 자연적인 인간의 쾌이다. 숭고의 감정은 고통 즉 구상력과 이성간의 불일치의 인식을 수반하나, 이성의 위대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 쾌로 변형된다. 따라서 우리는 숭고한 것에 의해서는 미에 의해서처럼 평온한 관조에 내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감동된다. 그리고 숭고의 감정은 도덕법칙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과 어떤 유사성을 지닌다. ‘숭고한’ 대상은 비록 전적으로 무목적적이고 심지어는 반목적적이긴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식능력의 사용에 있어서의 주관적 합목적성”을, 즉 이성의 초감성적 능력을 의식하게 해준다. 따라서 숭고에서 우리가 찬양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성적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위대성인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칸트의 정교한 체계성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즉 판단력은 자유로운 유희 중에 있는 구상력을 보편적 성격의 오성과 연관시키면서 스스로 발견하는 조화로부터 미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또한 판단력은 구상력을 이성 및 이성의 초월적 이념들과 연관지우는데서 스스로 창출해내는 갈등으로부터 숭고의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한편 우리가 사실상 안전한데도 자연의 압도적인 힘 때문에 자연이 두렵게 보일 때, 자연은 역학적으로 숭고하다고 판단된다. 물리적 피조물로서의 우리의 무력감은 도덕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무한한 우월성을, 즉 자연의 위험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이 침해당할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다. 이 경우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성은, 비록 개별적 인간은 이 위력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비하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다.  

높이 솟아 방금이라도 내려앉을듯한 험한 절벽, 번개와 우뢰를 품고 유유히 다가오는 하늘 높이 피어오른 먹구름, 온통 파괴력을 지니는 火山,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와 같은 것들은 우리들의 저항하는 능력을 그러한 것들이 가지는 위력과 비교해서 보잘 것 없이 작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한 곳에 있기만 하다면, 그 광경은 두려우면 두려울수록 더욱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이 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러한 대상들을 거리낌없이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 대상들이 정신력을 일상적인 凡庸 이상으로 높여주며, 또 우리의 내부에 전혀 다른 종류의 저항능력이 있어서, 그러한 저항능력이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외관상의 절대력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일으켜 준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같은 책, 128-129쪽


여기에서 우리가 실제로 찬탄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의 숭고함인 것이다.
그리고 숭고의 판단 또한 미적 판단과 마찬가지로 보편타당성을 요구하는 바, 그것은 선천적 기초에 의존한다. 칸트에 의하면 숭고의 감정은 만인에게 있을 수 있는 구상력과 이성간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제 2비판에 의해 보편적임이 증명된 도덕감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숭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숭고란, (자연의)어떤 대상의 표상이 심의를 규정하여 자연의 도달불가능성을 이념의 현시라고 생각하도록 할 경우에, 그러한 대상을 말한다. 같은 책, 137쪽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미가 특수한 종류의 객관적 성질(형식)을 기술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숭고는 주관의 심리적 상태를 기술해주는 말이라는 것이다. 어떻든 숭고는 언제나 심적 태도에 대한 관계, 즉 지적인 것과 이성의 이념에 대하여 감성을 지배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격률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숭고의 분석은 자연의 세계에서 도덕적 자유의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숭고의 경우에는 판단력이 구상력을 이념의 능력으로서의 이성에 관계시키므로, 우리는 감정을 오직 하나의 주관적 전제하에서만,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도덕적 감정이 있다고 하는 전제하에서만 요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미적 판단에 대해서도 필연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다.

3. 美的 判斷의 演繹

순수한 미적 판단, 즉 취미 판단에 있어 (주관적)보편성과 필연성에 대한 요청의 가능성 및 그 근거와 관련하여 칸트는 연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취미 판단들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우리의 믿음은 대상에서의 쾌가 완전히 무관심적이라고 보는 의식의 한 결과라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나 무관심성 자체는 취미 판단의 합법성을 전반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즉 무관심성은 취미 판단들이 지닌 논리의 한 부분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그 판단들의 연역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초월적 연역을 통해 미의 분석론에서 도출한 보편성과 필연성에 대한 요청이 정당한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한다. -그러나 그는, 숭고에 있어서는 그러한 연역이 전혀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직접적인 필연적 연관이 (숭고에 있어서는) 없기 때문이다. 숭고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것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필연적으로 엄존하고 있음이 분석을 통해 밝혀진 이상, 보편타당성의 요구를 정당화하기 위한 그밖의 작업은 있을 수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취미 판단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타당하기를 주장하며 필연적으로 찬동을 요청하면서도, 어떠한 실제적인 경험적 동의와도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선험적이라고 말해진다. 칸트에 의하면 그러한 판단들이 정당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선험적 원리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따라서 초월적인 정당화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취미 판단이 자기본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 본성으로 보아서, ........ 그 판단 자체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원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또 취미 판단이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반드시 찬동할 것을 동시에 요구할 수 있는 판단이라고 평가된다면, 취미 판단의 기초에는 어떤 하나의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든 주관적인 것이든) 선천적 원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심의의 변화의 경험적 법칙들을 구명함에 의해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는 것이다. ......... 따라서 미적 판단의 경험적 해명은 보다 더 고차적인 연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능력에 관한 하나의 초월적 구명이 가능하며, 이것은 취미 비판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취미가 선천적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취미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판가름할 수도 없을 것이며, 또 다소나마 권능을 가장하고라도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대하여 찬부의 판결을 내릴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150쪽


대상의 개념에는 의존하지 않고 단지 그 대상에 관해서 느끼는 자기 자신의 쾌감을 이유로 해서만 이 쾌감이 다른 모든 주관에 있어서도 동일한 객체의 표상에 딸린 것이라고 선천적으로, 다시말하여 타인의 동의를 기다릴 필요없이 판정한다면, 그러한 판단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같은 책, 163쪽


칸트에게서 이 해결의 통로는 이미 예비되어 있는 것이었다. 즉,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취미 판단의 주관적 조건이 만인에게 주어져 있는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종합적이면서 선천적인 취미판단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관적 조건이라는 것이 바로 두가지 인식 능력들(구상력과 오성)의 일반적인 협동성이다. 취미 판단은 특정 표상을 특정 개념하에 포섭시키는 것이 아니라 표상의 일반적 능력(구상력)을 개념의 일반적 능력(오성)하에 포섭시키는 것이므로 취미 판단의 유일한 주관적 조건은 바로 그 판단력 자체이다. 칸트는 미에서의 쾌를 판단력과 연관시킴으로써 취미 판단들이 어떻게 보편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고 믿었다. 그는 어떤 사물의 미에 대한 우리의 인지 상태를 표시하는 만족감이란, 대상의 형식적 합목적성이 인지될 때 구상력과 오성이 서로 조화되어 자유롭게 유희하고 있는 인식 능력들의 작용 결과라고 주장한다. 즉 취미 판단들이 정당화될 수 있기 위해서는 인식 능력들의 조화의식인 쾌가 표상력들이 주어진 표상을 인식 일반에 관계시키는 한에 있어서, 이러한 표상력들의 상호관계에서 나타나는 심적 상태에 근거한다는 데에서 가능해진다.
미적 판단에 있어서 판단력이란 “자기자신이 주관적으로 대상임과 동시에 법칙”이라는 칸트의 진술은, 미의 근거가 대상의 측면에서나 태도의 측면에서나 이미 상호주관적임을 암시해 놓고 있는 것이다. 즉 미적 판단의 이론은 상호주관적 타당성에서 그 명백한 요구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미 판단은 선천적으로, 다시말해 타인의 동의를 기다릴 필요 없는 종합판단이다. 왜냐하면 취미 판단은 객체의 개념은 물론 그 직관까지도 넘어서서 전혀 인식이 아닌 어떤 것, 즉 쾌 또는 불쾌의 감정을 술어로서 직관에 덧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취미 판단에 있어서 판단력에 대한 보편적 규칙으로서, 누구에게 대해서나 타당한 것으로서 선천적으로 표상되는 것은 쾌감이 아니라 이 쾌감의 보편타당성이다. 이 보편타당성은 심의에 있어서 어떤 대상의 한갓된 판정과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지각된다. ‘나는 어떤 대상을 쾌감을 가지고 지각하고 판정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적 판단이다. 그러나 ‘나는 그 대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러한 만족을 누구에게나 필연적인 것으로서 요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천적 판단이다 같은 책, 164쪽


그리고 이 판단력의 보편성은, 인식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 즉 ‘전달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밝혀진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공통감 공통감이란 모든 사람들 속에서 상정할 수 있는 주관적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무엇이 만족을 주는가를 감정에 의해서 규정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外感이 아니라 인식 능력들의 자유로운 놀이(유희)에서 나오는 결과를 의미한다.
을 전제로 한다. 즉 심성상태 혹은 쾌의 감정을 보편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공통감을 전제하는 형식적 합목적성의 체험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 공통감은 한갓된 감정이 아니라 판단의 능력을 위한 객관적인 원리가 되는 것이다.
미에 대한 반성에서 반성적 판단력의 과정-즉 경험된 대상의 형식적 합목적성에 대한 일반적인 반성에서의 인식 능력들의 조화로운 놀이(상호작용)-은 가장 일상적인 경험에서, 즉 어떠한 경험에서건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미에서의 쾌는 모든 가능한 인식에 필수적인 한에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상정할 수 있는 주관적 요소에 근거한다. 이러한 주관적 요소 또는 원리가 곧 공통감이다. 따라서 칸트에 의하면 취미 판단들의 기저를 이루는 주관적 원리는 모든 판단들의 기저를 이루는 주관적 원리와 동일하며, 그것이 모든 경험을 위해 필요한 가정이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추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칸트의 이러한 주장들은 취미 판단의 초월적 연역을 매듭짓는데에는 불완전한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쾌의 감정이 갖는 단순한 보편적인 소통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말하자면 ‘의무’로서 전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도 적법화하지도 않는다는 특수한 이유 때문이다. 즉 이상의 연역은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일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취미 판단들을 내리는데 대한 정당화를 보여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미적 판단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미적 판단력의 분석론의 마지막 절들에서 칸트는 위와 같은 그의 주요논증으로부터 예술과 자연, 제예술의 분류, 천재, 그리고 해학 등의 다양한 논제들에 관한 보다 산만한 성찰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 절들의 몇몇은 장차 낭만주의 미학을 여는 출구가 되고 있다. 그것들은 매우 흥미롭지만 실로 방대해서 논자의 이해의 한계와 본논의의 일관성을 위해 비켜가기로 하겠다.

4. 趣味의 二律背反

판단력이 변증론적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성적 논의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한 판단력의 판단들은 선천적으로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보편적인 판단은 이성적 논의가 전제된 판단이며, 이것은 논리적 추론의 대전제가 된다. 이때 판단력의 판단들 간에 가로놓인 대립이 변증론의 내용을 이룬다. 그리고 이 대립된 판단들이 자기의 판단을 보편적 규칙으로 삼으려 할 때에 변증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의 변증론이 아니라 미적 판단의 변증론인 것이다.
여기에서 취미판단의 이율배반 변증론이 가상의 논리학이요, 인식영역의 확장이며, 가능성의 총체개념이라는 것을 그 양의성에서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이 유명한 이율배반이다. (김광명, 『칸트 판단력비판 연구』, 113쪽, 이론과 실천, 1992)
이 나오게 되는데, 이러한 이율배반을 칸트는, 인간성의 초감성적 기체라는 개념을 통해 지양하고자 한다. 제시되는 이율배반은 취미에 관한 서로 다른 상투적인 두가지 명제 간의 명백한 변증론적 갈등으로부터 야기된다. 첫째, ‘누구나 각자 자기자신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럴때 취미 판단의 규정 근거는 물론 주관적이다. 그러나 이 판단은 다른 사람의 동의를 필연적으로 요구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둘째, ‘취미에 관해서는 논의를 할 수가 없다’ 이때 취미 판단의 규정 근거는 객관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규정 근거는 규정된 개념에로 환원될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취미 판단에 관하여 논쟁할 수는 있지만 증명에 의하여 결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쟁과 논의가 어떻게 다른가? 논쟁이나 논의는 양자가 모두 판단의 상호 모순이나 대립을 통해 이들 판단을 일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그러나 논의한다는 것은 규정된 개념에 따라 증명에 의해 이를 이루려고 하고 객관적 개념들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취미에 관해서는 비록 논의할 수는 없지만 논쟁할 수는 있다” 칸트에 의하면 논쟁이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기대하게 한다. 즉, 상호간에 의견이 합치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타당성에 그치지 않는. 더 진일보한 판단의 근거를 기대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구나 각자 자기자신의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명제는 서로 대립된다.
칸트에 의하면 이 두 명제는 앞에서 나왔던, 취미 판단이 개념에 근거하는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될 때 모순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취미의 원리에 관한 이율배반은 다음과 같다.

定立 : 취미판단은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취미판단에 관해서 논의를 할(증명에 의하여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反定立 : 취미판단은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다. 왜냐하면 개념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면, 취미판단이 다르다고 할지라고, 이 취미판단에 관해서는 논쟁을 할 (다른 사람들이 이 판단에 필연적으로 찬동할 것을 요구할) 수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 『판단력 비판』, 226쪽, 이석윤 역, 박영사, 1989


칸트는 이와 같은 이율배반의 해결에 대해 “이러한 종류의 판단에 있어서 객체와 관련지어지는 개념이 미적 판단력의 두가지 격언에 있어서 동일한 의미로 이해되지 않는다” 같은 책, 226쪽
는 사실을 밝히는 데에서 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것은 개념이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의미의 양의성을 밝혀냄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율배반의 해결은 일견 모순인듯이 보이는 것이 어떻게 해서 실상은 모순이 아닌지를 밝히는 데에서 구해진다.

취미 판단은 하나의 개념(판단력에 대한 자연의 주관적 합목적성의 근거 일반)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개념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규정될 수도 없으며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개념에 의해서는 객체에 관하여 아무것도 인식될 수 없고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취미 판단은 바로 그 개념에 의하여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 대한 타당성(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직관에 직접 수반하는 단칭 판단으로서이지만)을 획득하거니와, 이는 취미 판단의 규정 근거가 아마도 인간성의 초감성적 기체라고 간주될 수 있는 것에 관한 개념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 요컨대 우리는 어떤 판단의 보편타당성의 근거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개념을 두개의 모순되는 판단에 있어서 동일한 의미로 취하면서, 그 개념에 관하여 두개의 대립적인 술어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定立에 있어서는 ‘취미 판단은 규정된 개념 위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다’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反定立에 있어서는 ‘취미 판단은, 무규정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하나의 개념 (즉 현상의 초감성적 기체의 개념) 위에 근거를 둔 것이다’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에는 이들 정립과 반정립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게 될 것이다. 같은 책, 228쪽





5. 道德性의 象徵으로서의 美

칸트 미학 이론의 주요 원동력은 미적인 것의 자율성, 욕구와 도덕적 의무와 인식으로부터의 그것의 독립성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칸트는 그의 이러한 구분들을 이룬 후에 연관을 재확립할 수 있는 더 높은 단계를 찾는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도 결국 유사성을 갖게 된다는 것에서 찾아진다. 즉 “순수한 취미 판단과 도덕적 판단을 비교해보면, 전자는 어떤 관심에 의존함이 없이 만족을 느끼도록 하고, 또 동시에 그 만족을 인류 일반에게 상응하는 것으로서 선천적으로 표상하는 것이요, 후자는 그와 동일한 일을 개념에 의해서 하는 것인 만큼, 우리는 명석하고도 치밀한 숙고를 일부러 하지 않더라도 전자의 대상에 대해서나 후자의 대상에 대해서나 똑같은 직접적 관심에 이르게 된다. 다만 전자는 자유로운 관심이요, 후자는 객관적 법칙에 기초를 둔 관심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같은 책, 178쪽
말하자면 미적인 것은 반성적 직관으로서이고, 도덕적인 것은 개념으로서이지만, 둘다 어떠한 관심과도 결부되지 않은 채 직접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것이다. 우선 미적인 경험은 감각적 쾌감이나 구체적 관심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개념에서도 목적에서도 모두 떠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적 대상은, 그것이 아름다운 한 단지 합목적성의 형식을 드러내야 한다.
칸트는 순수한 취미 판단과 도덕적 판단 사이에는 유사한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는데, 특히 『판단력 비판』의 마지막 절에서 이를 잘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아름다운 것과 도덕적으로 선한 것 사이의 유비를, 그 차이에도 동시에 주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①아름다운 것은 직접적으로 만족을 준다. (그러나 단지 반성적 직관에 있어서만 그러하며, 도덕과 같은 개념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②아름다운 것은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만족을 준다.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물론 필연적으로 어떤 관심과 결부되어 있지만, 그것은 만족에 관한 판단에 선행하는 관심이 아니라 그러한 판단에 의해서 비로소 일어나는 관심이다) ③구상력의 자유는 아름다운 것을 판정함에 있어서 오성의 합법칙성과 합치하는 것으로서 표징된다.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는 보편적 이성 법칙에 따르는 의지의 자기 자신과의 일치라고 생각된다) ④아름다운 것을 판정하는 주관적 원리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누구에게나 타당한 것으로 표상되지만, 어떤 보편적 개념에 의해서도 인지되지 않는 것으로서 표상된다. (도덕의 객관적 원리도 보편적인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모든 주관에 대해 동시에 동일한 주관의 모든 행위에 대해 보편적인 것으로서 설명되며, 또한 그 경우에 어떤 보편적 개념에 의해 인지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같은 책, 244쪽


칸트가 미를 도덕성의 상징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비교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유비를 바탕으로 그는 실천 이성이 아름다운 사물에서 느끼는 무관심적 만족을 위한 상호 주관적 기초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상에 대한 미적 판정과 도덕적 판정간의 차이를 염두에 둘 때 미적 만족의 상호 주관적 타당성을 간접적으로밖에는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징이, 개념을 이에 수반하는 감성적 기호를 통해 나타내는 일종의 종속적 표시임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유비를 통해 개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이로써 경험적 직관들에 기여한다. 즉 상징은 개념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며 그것이 상징해내는 대상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미와 도덕성간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칸트는 미를 도덕성의 상징으로 보면서 ‘상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바, 여기서 상징이라 함은 선천적 개념의 간접적 현시이며 초감성적인 것이 감성화되어진 것을 말한다. 개념 없는 직관은 공허하며, 또 직관은 개념 없이는 맹목이기에 개념에는 직관이 필수적이지만, 선천적 개념이나 초감성적 이념에 대한 이론적 인식에 있어서는 직관이 주어질 수 없는 것이므로 간접적인 현시인 상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의 미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판단하는 데 취미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나 선한 영혼의 징표라고 주장한다 같은 책, 178쪽


그리고 이 말은 예술미에 대한 관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칸트는 덧붙인다. 왜냐하면 예술미에 대한 관심은 허영심으로 더럽혀져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미를 향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연 속에서 합목적성과 조화-이것을 우리는 도덕법칙에서 표현되는 우리 내부의 이성과 유사한 우주적 이성의 표현으로 인지한다-를 발견하여야 한다. 따라서 미는 도덕적 질서(인륜성)의 한 상징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인륜성이 “정신으로 하여금 감각인상을 통해 획득되는 쾌의 단순한 감수성을 넘어서는 어떤 고귀함과 고양감을 의식” 같은 책, 242쪽
하게 해주는 미의 능력의 진정한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의 자유개념은

자기의 법칙에 의하여 부과된 목적을 현상에 있어 실현해야만 하며, 따라서 자연도 그의 형식의 합목적성이 적어도 자유개념의 법칙에 따라 자연에 실현되어야 할 목적들의 (현실)가능성과 합치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근저에 놓여있는 초감성적인 것과 자유개념이 실천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과의 통일의 논리가 하나 있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책, 27쪽


바로 이 통일의 기반이 도덕성의 기초인 것이며, 아름다운것(그리고 숭고한 것)에 의해 상징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취미란 ‘도덕적 이념이 감성화된 것을 (이 양자에 관한 반성의 일정한 유비에 의하여) 판정하는 능력’이지만 양자는 서로 구별되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Ⅵ. 맺는 말


칸트는 미학 이론을 정초함에 있어서 미와 예술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 아닌 그의 철학 체계의 완성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의 미학 이론은 자신의 기본적인 철학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러한 칸트 미학 이론의 의의는, 그의 전체적인 철학 체계인 비판 철학 내에서  『판단력 비판』이 갖는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찾아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Ⅲ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그의 미학이론의 창의성은 이전의 여러 사상들을 그의 철학체계의 지평으로 끌어들인 그의 놀랄만한 건축술에 있기 때문이다. 『판단력 비판』에서 칸트는 자연의 세계와 도덕의 세계와의 일치, 혹은 연속성을 세움으로써 그의 철학적 체계를 완성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판단력이며, 미적 판단의 유일한 원리는 자연 및 예술의 합목적성의 이념에 있다. 칸트에 따르면, 미적 판단은 “판단력이 전혀 선천적으로 자연에 관한 그의 반성의 기초로 삼고 있는 원리, 즉 자연이 그의 특수한 (경험적)법칙들에 따라 우리들의 인식 능력에 대하여 가지는 형식적 합목적성의 원리를 포함”한다고 한다. 같은 책, 48쪽
그리하여 미적 판단력은 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을 통하여 자연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을 매개하며, 이 매개는 자연 개념에 의한 합법칙성의 세계에서 자유 개념에 의한 궁극 목적의 세계에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과 더불어, 칸트는 미학이론에 있어서도 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수행하고 있다. 18세기 미 이론의 가장 일반적인 문제는 대상의 어떤 성질이 우리가 미로서 간주하는 특별한 종류의 쾌나 만족을 야기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칸트 이전의 다른 철학자들의 답변은 경험하는 주관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된 세계의 한 측면으로서 상정되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칸트에 이르러 “미란 객체의 개념이 아니며 취미 판단은 인식 판단이 아니다” 같은 책, 165쪽
, 그리고 “주관의 감정에 대한 관계가 없다면 미란 그 자체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책, 76쪽
라고 규정됨으로써 미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어떤 대상의 미는, 어떤 사람의 미적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결과로서 그 대상에 부과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즉 대상들이 자체적으로 미로서 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선천적 원리에 따르는 인간의 심의의 능력들이 그렇게 판단되는 한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즉 미에 대한 객관주의적 해석에서 주관주의적 해석으로의 전환은 근대 미학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것이다.
칸트의 미의 분석, 즉 취미 판단을 통해 우리는 미적 자율성의 원리와 만나게 된다. 그는 미적 판단을 감관적 판단이나 선에 대한 판단과 뚜렷하게 구분함으로써 미적 자율성의 원리를 확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인간의 사회성이나 도덕성을 토대로 해서 성립되며, 그것은 미를 통해 이상적인 인간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적 주관주의, 미적 자율성의 원리를 통해 감각적 쾌로부터 구별할 수 없었던 영국의 경험주의 이론과, 미적 판단을 이성에 의한 인식 판단으로부터 본질적으로 분리시킬 수 없었던 대륙의 합리주의 이론의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적인 교과로서의 미학을 수립할 수 있었던 데에서 우리는 칸트 미학 이론의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미학의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는, 眞‧善‧美에 대한 상호차별성과 고유성에 대한 구분은, 서양사상사에 있어서 도도히 흐르고 있던 플라톤적 미학 이론 플라톤은 眞‧善‧美의 일치(What is true is good, and what is good is beautiful)를 주장하면서 윤리적 가치 = 미적 가치로 상정함으로써 예술을 궁극적으로 도덕에 종속시켰다.
을 완전히 철폐시키게 되었다는 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커다란 분기점을 긋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역으로 과학(적 가치)과 도덕에 대한 예술의 자율성을 웅변함으로써 낭만주의 미학의 출구를 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칸트 미학 이론이 갖는 중요한 의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취미론에서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전제를 이루고 있는 ‘무관심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무관심성의 개념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는 까닭에 추상적인 면을 갖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미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과연 무관심한 상태에 있는지, 어떤지를 알 수 없다. 또한 자기 자신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무관심성으로부터 추론되는 보편성과 필연성도 역시 주관적이기 때문에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요청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칸트는 연역의 과정을 통해 이를 정당화하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 불완전한 상태에서 끝나고 있다.
이러한 미적 무관심성에 대해 아도르노는 “무관심적인 것이 아무래도 좋은 상태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극히 강렬한 관심의 그림자가 수반되어야 한다” T. W. 아도르노, 『미학이론』, 27쪽, 홍승용 역, 문학과 지성, 1984
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즉 미적 무관심성은 개별적인 충일보다는 그러한 개별적인 충일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무제약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그러한 관심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무관심성에 내재해 있으면서 변화된 모습으로 재생된 이러한 관심을 아도르노는 ‘예술향락’ 혹은 ‘거세된 쾌락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예술작품의 사회적인 본질과 사회에 대해 반명제적인 본질 간의 좋지 못한 타협” 같은 책, 28쪽
이라고 지탄하다.
한편 무관심성의 이론들은, 인간의 내면적 도덕성에 기초한 개인을 바탕으로 하는 유토피아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칸트에 있어서 행동의 도덕적인 판정기준은 오로지 선의지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인 것을 심정의 주관적, 내면적 계기 또는 행동의 ‘동기’에서 파악할 뿐이다. 따라서 가능적인 행동결과들의 측면을 도덕성의 결정으로부터 차단한다. 미적 무관심성은 이러한 윤리적 측면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술문명은 우리의 생활환경들을 너무나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까닭에 우리가 이제까지 물려내려온 질서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하다. 과학의 기술적인 결과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작은 집단 내에서의 인간의 공동생활을 규정하고 다윈이 의미하는 바의 생존경쟁에서 집단들 간의 관계들을 관리하던 도덕적 규범들로써 만족하기란 더 이상 불가능한 그러한 사태가 인간 행동에서 벌어진 것이다. 한편 정치적인 권력의 신장은 개인적인 범죄등의 행위들을 참으로 약소한 것으로 만드는 대규모의 학살과 약탈을 끌어들였다. 이제 집단적인 이기심의 제어를 위하여 예술과 역사의 결합이 불가피하게 된 반면, 전통적인 미적 무관심성의 이론들은 예술을 고작 개인적인 이기심의 가능적인 대응물로밖에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서 그 한계가 노정되고 있는 것이다.



1995 학년도 2학기
학사학위 청구논문


      Kant에 있어서 美的 判斷力


지도교수 : 장 일 조 교수


한 신 대 학 교
철 학 과
8621041
이  재  심


                          목    차

Ⅰ. 머리말  ----------------------------------------  1
Ⅱ. 칸트 美學 理論의 성립배경  ------------------------ 2
  1. 社會的 배경 - 18세기 후반의 독일적 상황  
  2. 思想史的 배경 - 영국의 경험주의와 독일의 합리주의  
Ⅲ. 칸트 철학 체계 내에서의




상대성이론의 철학적 결과>버트런트 러셀
라이프니쯔의 "단자론" 원문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