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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매(2009-10-21 12:13:59, Hit : 2451, Vote :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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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과 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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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 有限                                
                                              -3조
1.아페이론
‘무한’이라는 말은 그리스어 ‘apeiron'을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결정되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 “정해지지 않은” 등을 뜻하는 ’apeirus'의 중성명사이다. 그래서 아페이론은 ‘무규정자(無規定者)', ’무한정자(無限定者)‘, ’미한정자(未限定者)‘, ‘비한정자(非限定者)’,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한다. 그러나 대표적인 뜻은 ‘무한한(infinite)'과 ’비일정한(indefinite)' 두 가지 이다. 무한은 끝이 없음을 뜻하고, 비일정(非一定)은 딱히 고정되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리스어 아페이론에는 이 두 의미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에 후대에 많은 혼란이 야기된다.
아페이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페라스(peras)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아페이론은 페라스 개념을 부여받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페라스는 우리말의 경계, 극한에 해당한다. 그리스 사람들은 극한(limit)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가 극한을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어떤 일정한 질서를 갖춘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 즉 경계를 지움으로서 하나의 존재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페라스=극한이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고로 페라스는 ‘규정성(規定性)’ 氣에 있서도 잠재적 氣와 形 · 質· 色을 띤 기를 구분한다. 바로 刑 · 質· 色이 氣가 일정하게 규정됨으로써 성립하는 것들이다. 어떨 때는 形이라는 말로 규정성들 전체를 대변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色과 質을 구분해 주기도 하는 등, 전통문헌들에서의 용법이 다소 혼란스럽다. 유명한 “形以上者謂之道 形以下者謂之器(형이상의 것을 일러 道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일러 器라 한다)”라는 구절에서도 形 이상과 이하를 나누고 있다. 이 경우에는 道와 氣를 일치시켜 쓰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구체적인 사물들은 形을 띤 것들, 形 · 質 · 色을 갖춘 것들로 이해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이것들을 ‘器’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결국 形 · 質 · 色이 바로 규정성들인 것이다.
이다. 규정성이란 한 마디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다. 즉 어떠한 존재를 독립된 존재로서 인식하게 해주는, 혹은 존재를 규정하는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이 규정성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성질(quality, property), 특성(propriety, characteristic), 빈위(賓位, attribut) 빈사(賓辭, 객어 ) 명제(命題)에서 주사(主辭, 주어)에 결합(結合)되어 그것을 규정(規定)하는 개념(槪念) .

, (문법적으로는) 술어(predicate, 철수는 “……하다”라 할 때의 ‘……’) 같은 것들이다. 만일 규정성이라는 것이 없다면 세계는 아무런 질서도 없을 것이요, 서로를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요, 어떤 차이들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규정성이라는 개념은 철학적 논의에서 매우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어떤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들 아래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따로 놀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그것들을 보듬고 있는 뭔가가 있을 듯하다. 이에 대한 답은 무수히 많지만 세 가지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자.
가장 기본적인 대답은 ‘물질’이다. 즉 ‘어떤 것’은 물질적 존재이고 그 물질이 여겨 가지 규정성을 띤다는 생각이다. 이 때 물질이라는 개념의 범위는 우선 물질이라는 개념의 범위를 좁게 잡고 나머지 사항들은 물질의 운동 · 변화를 통해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비슷하면서도 또 많이 다른 입장으로는 물질 자체가 우리가 경험하는, 나아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애초에 내포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생각할 경우 ‘물질’이라는 말의 의미는 ‘정신’의 반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까지 포함한 모든 것의 함축을 뜻하게 된다.(원자론) 세 번째 입장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형상철학’이다. 그런데 형상철학은 앞의 두 사고와 다르다. 형상철학은 규정성들과 그것들이 구현되는 터인 물질-이런 맥락에서는 ‘질료’-을 따로 떼어서 본다. 그리스적 질료-형상설에는 이렇게 규정되지 않은 아페이론이론으로서의 질료에 일정한 규정성들(페라스들)이 구현되어 만물이 형성된다는 생각이 깃들어 있다 형상철학의 구도에서 형상 · 理는 질료 · 氣에 대해서 초월적이다. 형상/리가 구체적인 사물로 화하려면 질료/기가 있어 그에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형상/리는 논리적-존재론적으로 질료/기 바깥에 존재한다. 이 질료/기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므로 질료에 ‘구현(具顯)’되는 것이다. 물론 형상/리는 질료/기에 구현되면서 질료/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질료/기의 역할이 분명히 있음에도 질료/기가 형상/리 자체를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이런 의미에서 형상철학적 구도에서 형상/리는 질료/기에 대해 초월적이다.
. 이에 비해 원자론 등의 기계론적 사유들은 물질 자체가 일정한 최소한의 규정성을 띠고 있고, 물질의 운동으로부터 다른, 보다 고급한 규정성들이 파생한다고 본다.
형상철학은 본질주의 철학이다. 그리고 대개 본질들의 체계가 ‘원융(圓融, 일체 제법의 사리가 널리 어울리어 하나가 되어 구별이 없음)’한 세계를 이룬다. 그래서 물질로부터 초월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관이 깨지면서 이제 이런 초월적 본질들의 체계는 인정되지 않고 모든 것은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들(fact)‘에 입각해 이해된다. 사실 이전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어떤 질서는 없는 것이다. 어떤 종(種)이 있어야/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상 있으면 그냥 있는 것이고 없으면 그냥 없는 것이다. 이런 양상을 가리켜 ’우발성‘이라고 한다. 전통 사유와 현대 사유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바로 이 우발성 개념에 있다.
형상철학은 존재와 당위의 혼합이라는 또 다른 특징을 함축한다. 이 세계가 사실에 입각해 “……하다”라고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해 초월적인 이법체계(理法體系)를 통해 이해된다는 것은 만물이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은연주에 내포한다. 즉 존재에 대한 이해에 당위의 뉘앙스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세계가 마땅히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하는, 따라서 인간의 경우역시 그가 우주에서 차지하는 본질=위치가 있고 그 본질=위치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아프리오리 a priori :'보다 앞선 것으로부터' 뜻의 라틴어 성구(成句). '선천적'이라고 번역된다. 철학에 있어 경험과는 관계 없이 알 수 있는 진리, 이를테면 논리법칙이나 수학의 정리(定理)를 '아프리오리한 진리'라고 한다.

한 이법이 전제되기 때문에, 세계의 세부적인 변화는 인정되어도 근본적인 변화는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전통 문헌들에 자주 등장하는 ‘망령됨[妄]’은 바로 이런 이법을 거스르는 행위에 붙여지는 말이다. 때문에 존재와 당위가 혼합되어 있으며, 이런 생각은 바로 성리학에서 말하는 ‘본연(本然)’이라는 개념에 농밀하게 함축되어 있다. 본연이 존재하고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존재론적-가치론적 토대 위에 형상철학이 서 있는 것이다.
이런 구도와 내재성의 구도는 다르다. 내재성의 구도는 물질성 위에 항구불변의 법칙성이 초월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이 운동하는 방식 자체가 이법이라고 생각한다. 氣가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모든 방식들이 理인 것이다. 그렇다고 기학적인 사유가 원유한 세계관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氣의 변화가 원융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실질적으로 이기 이원론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효한 것은 理가 초월적이냐 내재적이냐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理의 틀이 ‘理一分殊 ’와 같은 원융한 구조를 탈피했느냐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동북아 사유는 서구의 사유를 만나기 전에 그 틀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진화론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중엽 정도가 되어서야 ‘우발성’에 기반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진화론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진화론들은 사실 생명의 원융한 틀, ‘생명의 사다리’, 우주의 조화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요컨대 물질의 세세한 운동, 개체들의 차이들, 구체적 변화, …… 등이 결국 어떤 틀 안에서 빙빙 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유들, 즉 이법의 초월성을 전제하는 사유들은 그 세부적인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전근대적 사유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2.아페이론 개념의 역사
전통 사유들에서 ‘아페이론’은 대게 비일정의 뜻으로 쓰였다. 무한의 뜻으로 쓸 경우에는 대개 내적 무한, 즉 ‘무한 분할’과 관련되는 개념으로 쓰였다. 외적 무한, 즉 한없이 크다는 뜻의 무한 개념은 전통 사유들에서 희박했다. 이런 의미에서의 무한이 담론사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이다. 그리고 17세기의 형이상학은 ‘무한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무한 개념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르네상스 이전의 사유에서는 외적 무한 개념은 희박했다.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을 철학사에 등록시킨 사람은 아낙시만드로스였다. 그는 스승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원리를 물로 본 것을 비판하고 아페이론 개념을 제시한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보기에 물은 불, 공기, 흙과 대등한 지평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유독 물이 아르케가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사원소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 그로부터 사원소가 나오고 또 그리고 돌아가는 터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바로 그것을 아직 무엇인가 규정되지 않은 , 즉 물이나 공기, 불, 흙 그 어느 것으로도 규정되지도 않은 무엇으로서 제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결국 아낙시만드로스에서 아페이론 개념은 경험적으로 확인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추론된 것이다. 아페이론 자체는 경험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 필연적으로 아페이론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반드시 있다고 할 수 있는 어떤 것, 그런 것이 아페이론이다.
퓌타고라스 학파도 아페이론을 중요하게 다룬 경우에 속한다. 퓌타고라스 학파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쌍들을 정리했다. 하나와 여럿, 밝음과 어두움, 남과 여, 연속과 불연속, …… 등 열 개의 대립쌍들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을 페라스와 아페이론으로 보았다. 규정되지 않은 것과 그것을 규정하는 것을 최고의 원리로 보았던 것이다. 퓌타고라스 학파가 만물의 근원=원리를 수로 본 것도 결국 무규정자가 수에 의해 규정됨으로써 우주의 질서가 성립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퓌타고라스 학파에서 ‘무리수’가, 그 이름자체가 시사하듯이, 수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무리수는 아페이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서가 주어지기 이전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무리수는 엄연히 수이지만, 퓌타고라스 학파에게는 수/극한이 부여되기 전의 어떤 연속체=아페이론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그는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생성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생성이란 곧 연속성=아페이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연속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운동이 불가능하다. 즉 사물들이 즉자적으로 완벽하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면 운동은 없다. 자기동일성이 무너지고 타자와의 섞임이 가능해야지 운동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운동은 연속성=아페이론을 전제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런 현상세계는 실재세계의 그림자로 본다. 실재세계는 각각의 형상들이 모두 영원한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면서 불연속으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이런 형상들이 서로 관계 맺고, 또 질료에 구현될 때 생성하는 세계 속에서 존재가 성립한다. 플라톤은 이렇게 변화하는 세계, 생성하는 세계를 넘어 사물들의 심층적 형상들을 발견하려 했다. 그것은 곧 고정불변의 페라스를 갖춘 형상들이 질료=아페이론에 구현됨으로써 생성의 세계에 빠졌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래서 그 생성의 세계를 뚫고서 본래의 형상들을 읽어내야만 진정한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생성의 상태는 인식론적으로 볼 때 그저 카오스일 뿐인 것이다.
결국 참된 존재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생성의 와중에서 형상들을 발견해야 한다. 이런 사고를 ‘합리주의(合理主義)’라고 한다. 합리주의는 현상을 넘어 실재를 발견하고자 하며, 그런 발견의 능력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본다. 그런데 합리적 사유는 분석적 사유와 통한다. 분석이란 바로 혼란스러운 것, 생성, 복잡한 것을 면밀하게 나누어 명료한 것, 본질적인 것, 간명한 것을 발견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합리적/분석적 이성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결국 아페이론으로서의 생성의 와중에서 일정한 페라스들을 발견하려는 것이다. 감각세계를 뚫고서 본질세계, 즉 가지적(可知的=intelligible) 세계를 보려는 것이다.
근대 합리주의의 개조(開祖)인 데카르트가 분석에 대해 상세히 분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시대에 번져 있던 아페이론적인 사유들을 비판한다. 즉 연속성과 유사성에 입각한 사유들을 비판한다. 유사성의 사유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할 것들을 마구 이어버린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같음과 다름,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하는 분석적 사유를 강조함으로써 근대 합리주의를 열게 된다. 훗날 19세기 말, 20세기 초를 휩쓸었던 ‘생성’의 사유, ‘지속’의 사유에 대항해서 합리주의를 재건하려 했던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動的)인 변화발전의 위상(位相)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非)뉴턴 역학적(力學的)인 성격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비결정론(非決定論)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樣式)을 '비(非)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否定)의 철학》(1940)에서 '비(非)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에게서 유사한 논의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카오스, 연속성, 유사성, 흐름 같은 아페이론의 차원과 코스모스, 불연속성, 동일성과 차이, 분석적 요소들 같은 페라스의 차원은 늘 대립해 왔고, 탈합리주의와 합리주의의 전선(戰線)을 형성해 왔다. 무규정성을 정복하고 규정성을 추구한 것이 합리주의적 학문들이라면,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무규정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하려는 경향들도 있는 것이다.  

3.유한에서 무한으로
이제 비일정/무규정으로서의 아페이론에서 무한으로서의 아페이론을 보자. 비일정을 둘러싼 논의들은 철학의, 특히 그리스 철학의 독특한 문제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가 ‘종자=스페르마타’를 이야기하고 데모크리토스가 ‘원자=아토마타’를 이야기하는데, 이 때 이들은 이 종자들이나 원자들이 “무한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들이 관연 오늘날 우리가 (수학적 뉘앙스를 넣어서) 말하는 무한을 뜻했는가는 의문스럽다. 다른 지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서구도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는 유한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무한(無限)'이라는 말은 대개 어마어마하게 큰, 끝이 없을 정도로 큰 경우를 말하지 오늘날의 무한을 뜻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 · 중세에, 특히 그리스에서 무한이 논의되었다면 거의 외적 무한보다는 내적 무한에 관련된 것이었다. 즉 바깥으로 한없이 큰 경우보다는 안으로 한없이 잘라 가는 경우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즉 무한분할의 문제이다. 무한분할과 관련해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제논의 파라독스제논의 역설 중에 널리 알려진 것들은 다음과 같다.
(1)모든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A----E----D--------C---------------B
A 에서 B까지 움직이려면 반드시 선분AB의 중점 C를 지나야 한다. 또 C까지 가려면 선분 AC의 중점 D를 지나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중점을 계속 지나야 하는데, 그런 점들은 무한히 많으므로 A에서 B까지 영원히 갈 수 없고, 따라서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2) 아킬레스(Achiles, 아테네의 유명한 달리기 선수)는 앞에 도망가는 거북이를 영원히 잡을 수 없다.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처음 있던 점까지 가면 거북이는 이미 어느정도 전진해서 좀더 앞에 가 있다. 또 그 점까지 가면 이미 거북이는 좀더 앞에 나가 있다. 이렇게 계속 전진해 나가면 영원히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잡을 수 없다.
(3) 공중을 나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하고 있다.
움직이는 화살이 어느 특정한 지점 A에 왔을 때, 그 위치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다. 또 다른 특정한 점 B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B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다. 또, C, D, E, …… 등 계속 그 위치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으며, 이런 일들이 순간적으로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화살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다. 多와 운동을 부정했던 스승 파르메니데스를 옹호하기 위해 제논은 여러 가지 역설들=파라독스들을 만들어낸다. 제논은 ‘귀류법(歸謬法)’을 사용한다. ‘reductio ad absurdum(reduction to absurdity)'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A라는 주장을 논파하기 위해서 “만일 A가 맞다고 해보자”고 가정하고 거기에서 불합리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para-dox'라는 말은 두 개의 ‘dox'(의견, 생각)가 평행을 달린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경험에 입각하면 분명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추월한다. 다른 한편으로 제논의 논리를 따르면 아킬레우스는 절대로 거북이를 추월하지 모한다. 이런 경우가 ’paradox'를 형성한다. 그런데 제논의 논리는 무한분할을 전제하고 있고, 여기에서 무한 및 연속성(무한 분할은 선분의 연속성을 전제한다.)의 개념이 문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가능적 무한과 현실적 무한을 구분함으로써 해결하려 했다. 가능적 무한은 한(限)이 없으니 끝나지 않은 운동(연산, 과정)에서 성립하는 무한이고, 현실적 무한은 (현대적으로 말해) 예컨대 ‘자연수의 집합’ 같은 단적인 무한이다. 말하자면 가능적 무한은 영어의 ‘illimitable'이나 프랑스어의 ’illimite'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적 무한은 ‘the infinite'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전자가 ’리미트=극한‘을 찾으려 하지만 끝없이 연기되는 경우에 성립한다면, 후자는 단적으로 존재하는 무한 자체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관점에서 제논의 역설에 도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현실적 무한은 불가능하다. 가능적 무한만이 인정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적 무한 개념을 비판하고 유한의 세계관을 수립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각도에서 무한주의 세계관을 비판한다. 첫째, 만일 무한한 물체가 있다면 이 물체 외에 또 다른 물체들이 있다는 것은 모순 된다. - 이 추론에서 세계는 多 라는 것이 전제된다. - 무한한 물체가 있고 또 다른 물체들이 있다면 무한한 물체는 결코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무한한 물체가 다른 물체들에 의해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물체들이 한꺼번에 무한한 경우는 더더욱 곤란하다. 무한하다는 것은 바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바깥을 가지는 것, 타자들의 존재를 허락하는 것은 무한할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多의 세계에서는 무한이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는 어딘가 이상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무한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면 으레 무한한 공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무한에 대해 공간을 가지고서 논하기보다 물체를 가지고서 논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늘날 텅 빈 공간이 먼저 있고 거기에 물체들이 자리 잡는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뉴턴적 이미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고중세 사상들-는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실체)과 그것에 부대(附帶)해서 존재하는 것(성질들)을 구분한다. 그리고 이 성질들 중 하나가 바로 공간이다. 그래서 물체(실체) 이전에 공간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표면이 존재하지 않는데 색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언제나 어떤 실체가 존재하고 그것에 부대해서 공간이 존재한다. 정확히 말해 ‘공간’이라기보다는 ‘장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론은 정확히는 장소론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이해해야 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물체로 볼 수 없다고 본다. 즉 하나의 개념일 수는 있지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의미에서의 존재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규정자/무한으로서의 아페이론 개념을 비판한다. 굳이 아페이론이라는 말을 쓴다면 ‘무규정자’로서만 쓸 수 있을 뿐 ‘무한’으로는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경험을 초월하는 존재를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우주는 원환 운동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역시 무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원환 개념은 이미 유한성을 함축하고 있다. 즉 원은 유한하지만 끝은 없으므로 어디에서 끊을 수가 없다. 이런 여러 생각에 입각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한주의의 세계관을 전개한다.
현대인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한주의에 대해 우주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 해도 공간은 있지 않겠는가?란 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현대 우주론도 유한주의다. 빅뱅 이론에 의하면 우주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한다. 커지고 있지만 일정한 테두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우주가 그렇게 커지기 위해서도 그 바깥에 공간이 있어야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물질은 없어도 공간은 있는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중세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공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적인 무한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잠재적인 무한은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고 전술했다. 제논의 역설에서 볼 수 있듯이 물체를 무한히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프리오리한 추론이다. 고대인들에게는 텅 빈 공간은 없고 물질로 차 있는 물질-공간만이 인정되었다. 그런데 공간은 논리적으로 무한분할이 가능하다. 공간이란 필연적으로 외연(外延,=extension)을 가지기 마련이고, 외연이 있는 한 분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공간도 외연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고 따라서 분할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둘은 구분되어야한다. 이런 생각은 공간이라는 존재의 성격으로부터 추론된 것이지 실제 분할해 봐서 얻은 결론은 아니다.
중세가 되면 무한 개염의 위상이 달라진다. 특히 플로티누스의 사상이 분기점이 되는데 플로티누스는 플라톤주의에서 신비주의적 측면을 이어받아 보다 강화했다. 그 과정에서 플로티누스는 일자(一者)에게 무한의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중세 기독교에서 신의 ‘초월성’이라는 개념과 맞물리면서 정착하게 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리스에서와 대조적으로 중세에 무한이 찬미되었다면, 그것은 무한을 외연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내포/강도(intensity)의 관점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즉 중세의 무한은 공간적 무한이 아니다. 우주론에서는 여전히 유한주의가 견지되었다. 그러나 ‘형상적(形狀的) 무한’, 즉 한 사물의 완전도(完全度)에서의 무한, 권능(權能)에서의 무한은 이제 찬미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수적(數的) 무한은 이런 신의 무한 앞에서는 유한에 불과한 것이 된다.
내적 무한의 맥락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특히 니콜라 오렘의 역할이 컸다. 오렘은 오늘날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그래프’라는 것을 처음 창시한 인물이다. 시간의 함수로서의 운동을 공간화해 그래프로 나타낸 것은 근대 과학의 초석을 놓은 것이다. -이 그래프라는 것만큼 분석적 이성의 특성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시간이 공간화, 사물들에서 양화(量化) 가능한 것들(즉 변수)에의 주목, 변수들 사이의 함수관계의 추적, 함수관계의 시각화(사물의 변화를 눈길 아래에 “동시적으로” 놓는 것)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래프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기하학적 도형은 연속량(連續量)을 다룰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대수적으로는 무리수를 표현할 수 없지만, 선(線)으로 표시하면 무리수가 얼마든지 표시된다. 기학적으로는 무리수가 더 이상 ‘無理數’가 아닌 것이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오늘날 극한이라고 불리는 개념을 생각해 낸 인물이다. 쿠자누스는 일급의 수학자는 아니었으나, 수학적 발상을 신학에 적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神)을 일종의 극한으로 본 것이다. 쿠자누스는 현실적 무한을 ‘부정적 무한’으로 불렀는데, 이 때의 ‘부정’이라는 말은 ‘부정신학(否定神學)’ negative theology,  '긍정 신학(positive theology)'은 하느님은 무엇이라고 긍정함으로써 단지 피조물의 관점에서 하느님을 규정하고 제한할 뿐이지만, '부정 신학'은 하느님은 무엇이 아니라고 부정해 나감으로써 긍정적 규정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무한성을 서술하고자 한다
에서의 ‘부정’의 뉘앙스와 같다.
이렇게 무한 개념의 위상이 중세에 이르러 달라지고, 그 후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에 이르러 무한의 형이상학이 활짝 꽃피게 된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 사람들에게 각광받는 개념들이 있기 마련인데, 르네상스 시대와 17세기는 바로 무한의 시대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우주의 무한을 주장함으로써 담론사에 큰 분기점을 가져온 인물은 조르다노 부르노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케플러, 갈릴레오 등)이 여전히 우주의 유한성을 믿고 있었을 때, 부르노는 우주는 무한하다는 것, 우주에는 절대적 중심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비롯해 과감한 주장들을 펼치다 결국 교회의 미움을 사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르네상스 말기가 되면 이제 우주의 무한이라는 개념은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4.무한의 사유(17세기 철학과 수학)
17세기는 서구 사상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기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무한 개념에 입각한 사유가 활짝 꽃피었는데, 특히 형이상학과 수학 분야에서였다.
데카르트는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에 들어 있는 ‘무한’이라는 의미와 ‘비일정’이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비일정’은 인간 지성의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모호함이지만, 무한은 명료하고 분명한 개념 명료하다는 것은 어느 하나가, 한 개념이 어두운 구석 없이 깨끗하게 다 들어난다는 것,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분명하다는 것은 둘 이상의 것, 둘 이상의 개념들이 서로간에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뜻이다. 명료함의 반대말이 애매함이고, 분명함의 반대말이 모호함이다. 흔히 ‘명석 · 판명’으로 번역한다.
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무한은 현실적 무한을 가리킨다. 현대인에게조차도 무한이라고 하면 일단 난해하고 신비한 그 무엇인데 17세기 철학자들에게는 무한이란 매우 친숙한,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개념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20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메를로 퐁티 Merleau-Ponty, Maurice, (1908.3.14~1961.5.5), 프랑스의 철학자.
는 17세기 철학자들은 무한 개념에서 사유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무한이란 설명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설명해 주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무한을 신의 속성으로 본다. 영혼과 물질은 유한 실체이고 신은 무한 실제이다. 그런데 이 시대가 되면 유한주의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무한을 토대로 한 세계관이 이미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무한은 외연적 무한이다. 그렇다면 즉 우주가 무한하다면, 신도 우주에 포함될 것인가? 과거에는 우주가 유한한 것으로 표상되었고 그 바깥에 신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데카르트는 양적 무한과 질적 무한을 구분한다. 양적 무한은 질적 무한에 비한하면 유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적=수적 무한은 신의 피조물이다. 신의 질적 무한, 즉 권능에 비한다면 유한한 것이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해결된다. 그리고 또 하나 실체가 세 개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실체란 타자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것인데, 실체 바깥에 또 다른 실체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신까지 감안하면 삼분법)을 비판하고 완전히 일원적인 형이상학을 구축하려 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 신=자연이라는 스피노자의 관점을 무신론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그가 인격신을 거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 무신론이다. 그래서 18세기 계몽사상시대에 스피노자가 각광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물질성을 신으로 본 것은 아니다. 물질성은 신의 한 측면이다. 즉 신의 한 속서이다. 신은 물질성과 정신성을 대등한 두 속성으로 띠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 존재는 아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범신론자이다.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신 바깥에 무엇인가가 있다면 신은 그 무엇에 의해 제약될 것이고, 신은 유한한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에게서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이분법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세계를 초월해 있는 창조주의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만들어진 것, 피조물로 보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神=自然(Natura)=실체만이 존재한다. 세계에서의 모든 변화는 다름 아닌 이 신=자연의 변양(modification)이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얼핏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多와 운동을 인정한다. 우리 몸이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수많은 것이듯이, 신=자연은 궁극적으로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양태들로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리고 양태들이 변해 가는 것이 변양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변양에는 일정한 갈래가 있다. 그 갈래들을 스피노자는 ‘속성’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물질과 정신이 두 속성이다.

5. 무한론의 조락(凋落)
18세기가 되면 이제 무한의 형이상학은 퇴조한다. 그러면서 철학에서의 무한론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그건 경험주의의 대두 때문이다. 경험주의는 인식의 범위를 경험에 국한시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당시의 영국 경험론에 있어 ‘경험’이란 사실상 지각을 뜻했다. 데이빗 흄이 단적으로 말했듯이 인식의 근거는 사물이 우리 몸과 부딪힘으로써 마음속에 생겨나는 ‘인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일체의 것들은 사변적인 것들로 거부당하게 된다. 사실 오늘날의 맥락에서 보면 경험을 ‘지각’에 국한시키는 것은 몹시 빈약한 인식론이다. 그래서 그 후 독일 관념론자들은 보다 ‘주체적’인 경험을, 딜타이 같은 사람은 역사적인 ‘체험’을, 또 후설, 베르그송, 제임스, 니시다 기타로 같은 사람들은 인간의 깊은 내면적 체험을,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실존적 고뇌를, 화이트헤드, 들뢰즈 같은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경험들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확장된 경험론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당대에 경험주의는 과거의 사변적인 철학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이 입장에 설 때 무한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은 단적으로 거부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물리학도 그 사변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는 비판받게 된다. 다만 수학은 별도의 위상을 부여받게 되고 그래서 수학적 무한만이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버클리 같은 사람은 무한소 미분이 경험주의적으로 볼 때 인정하기 힘든 측면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 맹렬하게 공격한다. 사실 근대 내내 경험주의(나중에는 실증주의)는 과학적-철학적 사변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 칸트 같은 사람은 아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날카롭게 갈라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까지 알 수 있는 가는 시간이 흐르면서, 경험 속에서 계속  달라지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철학은 인간의 지적 모험을 아프리오리하게 막아버리는 그릇된 인식론이다. 20세기가 되어서야 경험주의/실증주의의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게 되면서 다시 형이상학적 사유가 전개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경험주의, 비판철학, 실증주의의 발흥을 통해서 형이상학적 무한론이 한풀 꺾이게 된 바로 그 시점에서 수학적 무한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해 활짝 핀다는 사실이다. 오일러, 크로넥커, 코쉬, 데데킨트, 바이어스트라스, 칸토르 등 근대 수학에서 현대 수학으로 넘어오는 길목에서 등장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수학적 무한론을 새로운 수준으로 다듬어 낸다. 오늘날 무한 개념은 적어도 수학적으로는 상당 수준 해명되어 있다. 그러나 수학적 무한과 물리학적 무한, 또 철학적 무한, ……등은 엄연히 다르며, 무한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참으로 매력적인 문제다.    




운명,우연 필연
실재와 본질,실체와 실제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