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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매(2010-03-06 13:26:25, Hit : 2238, Vote :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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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무경계(無境界:No Boundary)

무경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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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無境界]- 켄 윌버  譯 김철수

                           No Boundary   Ken Wilber



          



대립을 만들어 낸 것은 경계선 자체이다.
안팎의 대립은 우리가 경계를 원을그리기 전까지는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경계의 문제이며, 경계가 만들어낸 대립의 문제라는것..

이것의 해결책으로 대립 중 어느 한쪽을 근절시키려는 틀에 박힌 시도였다. 악을 전멸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선악의 문제를 다루며, 철학에서는 개념적 대립의 문제를 양극 중 하나를 내던지거나 다른 것에 환원시키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유물론자는 마음을 물질로 환원시키려 하고, 유심론자는 물질을 마음에 환원시키려고 노력한다. 일원론자는 다원성을 통일성에 환원시키려 하고, 다원론자는 통일성을 다원성으로 설명하려고 애쓴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경계를 실.재.하.는.것으로 받아들이고, 경계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을 실재로 다루려고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경계 자체의 존재를 결코 의문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대립이란 영원히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임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모두의 선을 위해 함께 협력한다는 것, 모든 세계의 근본원리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 긴 안목에서 볼 때 모든 존재가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것. 우주의 질서란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았다.  [R.M. 버크 ]





            


위와 같이 오목면을 나타내는 선을 그어보자. 똑같은 하나의 선이 볼록면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이것이야 말로 도가의 현자 노자가



“모든 대립은 상호적으로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 선은 오목면과 볼록면을 구분 짓기는커녕, 오목면의 외선은 볼록면의 내선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은 다른 쪽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대립물은 함께 생겨난다. 오목면을 어떻게 그리던지 그 한 개의 선이 또한 볼록면을 그리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은 경계가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논리적인 것이든 선은 나누고 구분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묶고 결합시킨다. 경계는 순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경계는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는 척만 할 뿐이다. 현실세계에서 선은 있지만 그 어떤 실질적인 경계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경계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해안선, 지평선, 피부표면 같은 자연의 선을 따르거나 정신적인선[관념, 개념]을 구축하여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분류하고 나눈다. 부류의 안과 밖, 바위와 바위 아닌 것, 장애자와 비장애자, 즐거운 것과 즐거움이 아닌 것, 큰 것과 큰 것이 아닌 것의 차이점을 인식하도록 배운다.



이 시점에서 선은 경계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명백히 드러난 차이점은 인식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통일성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우리가 부류[class]의 안과 밖에 이름을 붙이고 말에 상징성을 부여해 감에 따라 더욱 촉진된다.



동일한 부류의 안쪽에 적용하는 빛 위  즐거움과 같은 단어는 그 바깥에 적용되는 어둠  아래  고통 과 같은 단어로 대립의 상징물을 독립적으로 분리해서 조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즐거움을 원한다.”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 보자. 이 문장에서는 즐거움의 필수적인 대립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현실세계에서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과 떼어 낼 수 없는데도 단어에 의하면 즐거움과 고통을 분리시킬 수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즐거움과 고통 사이의 선은 경계가 되고

그 둘이 단절되어 있다는 환상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대립은 그저 하나의 과정에 대한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서로 다른 과정이 존재한다고 상정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에서 두 개의 세계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단일한 것이 틀림없는 진실이 모순으로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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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의식상태

"무경계"에서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다.

운명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

길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이것이 궁극의 진실이다.


-Sri Ramana Maharshi-


합일의식은 시간 없는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현재에 존재한다. 또한 분명히 지금에

도달할 방법은 없다.이미 그러한 것에 새삼 도달할 방법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라마나가 시사한 것 처럼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궁극의 진실이라고

선언한다.


이말은 이상한 결론 또는 적어도 당혹스러운 결론 처럼 보인다.

특히 우리는 스펙트럼의 다른 수준드에 접촉하는 몇 가지 실천

적인 방법을 탐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몇 개의 장에서 우리는 다른 수준으로의 하강을 촉진하는

특정한 훈련, 기법 및 수행방법이 있다는 점을 보아 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수준에 접촉할 수 있는 것은 그 수준

들이 부분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지 않은 의식상태이기

때문이다. 각 수준들은 다른 수준과는 다른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수준을 배제하고발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미묘하든 조잡하든 경계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선택적

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합일 의식 수준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합일의식은 부분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합일의식은 거울이 모든 대상을 똑같이 비추는

것처럼,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합일의식

이란 다른 상태이거나 다른 상태와 분리된 별개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상태의 조건이자 진정한 본성이다.


만일 합일의식이 다른 상태와 별개의 것이라면 (예컨데 지금의

각성과 다른것이라면)그곳에는 자신의 현재 각성과 합일의식을

분리시키는 하나의 경계가 있다는 것을 의밀할 것이다. 그러나

합일의식에는 어떤 경계도 없다. 즉 ,그것과 어떤 것을 분리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 순간, 바로 지금

이순간에 선명하게 빛을 비춘다.


이점을 설명하는데는 아마도 다순한 비유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스펙트럼의 여러 수준은 대양의 수많은 파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파도는 다른 모든 파도와 분명히 다르다. 해변가에서

가까운 파도는 강력하고 힘차지만 먼 곳으리 파도는 약하고 힘이

없다.  그러나 파도 하나 하나는 다른 모든 파도와는 분명히 다르며

그렇기에 파도타기를 할 경우 자신의 능력에 따라 특정 파도를

선택하고, 그 파도에 올라타고,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파도가 서로 다르지 않다면 이런 일은 할 수 없다.

스펙트럼의 각 수준은 하나의 특정 파도와 같은 것이며, 그렇기에

올바른 기술과 충분한 훈련을 통해서 그들 중 어떤 것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합일의식은 특정 파도라기 보다는 물

자체에 가까운 것이다. 물과 파도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어떤

차이도 어떤 분리도 없다. 어떤 파도도 다른 파도보다는 더 축축

하지 않다는 점에서 물은 모든 파도에 동등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만일 모든 파도의 상태인 축축함 그 자체를 찾고 있다며

이 파도에서 저 파도를 옮겨 타기를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축축함을

찾으려고 파도 옮겨타기를 하는 한, 분명히 지금 타고 있는 파도

에도 순수한 축축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합일의식을 찾는 것은 물을 찾아 경험의 파도를 차례로

도약하는 것과 같다. 길도 없고 성취도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위대한 선사 하쿠인은 이와 유사한 비유를 마음속에

품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중생은 진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먼 곳에서 찾는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비유컨데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짖는 사람과 같다.

[출처] 궁극의 의식상태"무경계" (신나이푸른불꽃) |작성자 푸른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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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 영토

켄 윌버"무경계"에서~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비밀을 감히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우주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는 것이다. 경계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실재를 작도하고 편집한 방식의 산물,즉 환상이다.

따라서 영토를 지도화하는 것은 괜찮은 일이지만,그 둘을 혼동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단순히 대립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는 정도가 아니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이 우주 어떤 곳에도 사물이나 사상 사이를

구분 짓는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경계의 실재를 현대 물리학에서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곳은 없는데,

이는 케플러 , 갈릴레오,뉴턴으로 대표되는 고전물리학이 지도 제작자이자

경계선 구축자인 아담의 진정한 후계자였음을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담이 마침내 세상을 뜨면서 , 인류에게 자신의 지도와 경계선 제작이라는

유산을 물려 주었다. 모든 경계에는 정치적인 힘과 기술적인 힘이 수바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아담의 경계 긋기, 분류하기, 이름 붙이기는 기술적인 힘에 의한 자연적

지배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실, 히브리 전통에서는 지식의 나무가 실제로 감추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의 지식이 아니라 유용한 지식과 쓸모없는 지식, 즉 기술적인 지식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경계에는 기술적인 힘과 정치적인 힘을 수반하는가 하면

그것은 동시에 소외, 단편화, 갈등을 수반한다. 왜냐하면 무언가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 경계를 설정할 경우, 그와 동시에 통제하려는 것으로 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소외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때문에

아담의 단편화로의 타락을 원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담의 후예들은 엄청난 노력으로 또 다시 경계선을 만들고

보다 미묘하고 추상적인 경계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은 여러 세대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인물, 즉 위대한 지도 제작자와

경계선 제도사들이 출현한 것은 그리스에서 였다. 예컨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교함과 설득력을 갖고 자연속의 거의 모든 과정과 사물을 분류해 냈다.



유럽인들이 그가 만든 경계선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만도

수세기가 걸렸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분류가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

하다라도, 그런 유형의 경계선으론, 적어도 과학적으로 ,그저 묘사하고 정의

내리는 일 이외에 별다른 일을 해 낼 수 없다. 단지 질적인 과학, 분류하는 과학에

그칠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만, 일단 최초의 경계를 설정해 놓으면, 세계가

분리된 사물과 사상의 집합체처럼 보이기 때문에, 보다 미묘하고 추상적인 종류의

경계로 진행해 갈 수 있다. 예컨데 피타고라스와 같은 그리스인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해냈다.



말에서 오렌지, 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사물과 사상의 부류들을

점검하면서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것은 이 모든 다양한 대상에게 놀라운 책략을

시도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사물을 셀 수 있었다.



이름짓기가 마술처럼 보였다면, 계산은 성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이름이 사물을 마술적으로 대표할 수 있다면, 수는 사물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오렌지 한개에 하나를 더하면 두개의 오렌지가 되는데,

사과 역시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두 개의 사과가 된다.



둘이라는 수는 두 개로 된 모든 집단에 공평하게 적용되므로, 어떤

의미에선 사물의 특성을 초월한 것임에 틀림없다.추상적인 수에 의해서

인간은 구체적인 사물로 부터 마음을 해방시키는데 성고했다. 이런일은

첫 번째 유형의 경계,즉 이름 짓기, 분류하기 ,식별하기 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가지는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는 이러한 힘을 극적으로 끌어올렸다.

수를 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유현의 경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 즉 메타 경계였다.

메타 경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했다.



첫 번째 유형의 경계로 사람들은 다른 사물들 사이에 구분선을

긋고 그것들을 하나의 집단 또는 분류로 구성한 다음, 개구리,치즈

산 또는 그 밖의 이름을 짓게된다. 이것이 최초의 또는 기본적인 유형의

경계이다. 일단 첫번째 경계를 그렸다면 , 그 뒤에 두 번째 유형의 경계를

긋고 그것들을 셀 수 있게 된다. 즉 첫 번째 경계가 사물의 분류를 만들어 내면,



두 번째 경계는 부류들의 부류를 만들어 낸다. 예컨데 7이라는 수는

일곱 개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의 집단이나 부류를 동일하게 나타낼 수있다.

7이라는 수는 일곱 개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의 집단이나 부류를 동일하게

나타내게 된다. 7이라는 수는 포도 일곱송이,칠일,일곱 난장이 등을 나타낼 수

있다. 다시 말해 7이라는 수는 일곱 개로 이루어진 모든 집단들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류의 부류, 경계 위의

경계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수와 함께 새로운 유형의 경계,보다 추상적이고

보편화된 메타 경계를 만들어 낸다. 경계는 정치적, 기술적인 힘을 수반하기

때문에 인류는 그로 인해 자연세계를 지배하는 능력을 배가시켰다.



이제는 옛 물리학에서 무엇이 잘못되어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옛 물리학은 자신이 그은 메타 경계와 메타- 메타 경계의 성공에 너무나

도취해서 경계 자체의 원래 성질을 철저하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메타 경계와 메나 - 경계가 너무 유용했고 또한 정치적 기술적인 힘을

수반했기 때문에 ,고전 물리학자들은 원래의 경계가 거짓일지 모른다는

점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다. 바꿔 말하면 고전 물리학자들은 분리된 사물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달시켜 왔지만 뜻밖에도 분리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운 양자 물리학들은 원래 경계 자체의 관습적인 성질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실재하는 어떤 경계도 전혀 발견해 낼 수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경계란 느끼고 ,만지고 측정하기 위해 저기 있는

실재의 산물이 아니라, 실재를 지도로 그리고 편집하는 방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리학자 에딩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학이 가장 멀리 발전해 간 곳에서, 정신이 자연에

부여했던 것을 자연으로 부터 다시 끌어내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우리는 미지의 해변가에서 이상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했고,

그 발자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이론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고안해냈다. 마침내 우리는 발자국을 만든 존재를 재구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보라! 그 발자국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출처] 무경계 영토 (신나이푸른불꽃) |작성자 푸른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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