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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속에 드러난 인간존재의 길

불교 속에 드러난 인간존재의 길

이 이 화(외국어대)

1.불교의 근본입장
2. 원시불교
  1) 무상
  2) 무아
3. 인간존재의 길
  1) 연기
  2) 보살


1.불교의 근본입장

생노병사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의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의 근거를 묻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의 의의를 묻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상에 존재한 수많은 사상과 종교의 흔적 역시 죽음에 대한 인간존재의 근원적 불안이 생을 묻고 또한 생을 넘어선 영역을 묻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을 통해 역으로 현재의 삶의 모습을 검토하는 존재, 바로 이와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존재임을 시사한다.
불교사상을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이와 같은 모습이 무엇보다도 불교의 가르침 속에 잘 드러나 있고 또한 그 가르침이 오늘날 역시 생생히 남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넘어선 신의 영역을 상정하지 않고 현실의 인간존재의 모습을 바로 자신의 현실을 통해 묻고 답하며 실천해 가는 종교, 그것이 바로 불교인 한, 불교를 인간존재의 길, 즉 윤리사상사라고 하는 한정된 시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인간이 성인으로서의 붓다가 되는 길을 가리키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며, 또한 이 가르침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현실존재를 성립시키는 법을 명확히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존재의 미망(迷妄) 적 모습을 바로 이 현실 속에서 멸해 가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한, 불교는 명백히 인간존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실천철학이기 때문이다. 본인이 불교학 전문의 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교사상을 통해 그 속에 드러난 인간존재의 길을 보고자 하는 데는 바로 이와 같이 석존의 출발점이 바로 그 자신이 처한 현실세계였으며, 또한 그러한 현실의 직시를 통해 현실 속에서 현실의 지양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한 실천적 자각, 바꿔 말하면 당위로서의 윤리의 자각이 바로 불교사상 속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논문에서는 불교사상을 모두 석존의 사상으로 통합하려는 시도, 더 나아가서는 석존의 사상만이 불교사상이라는 입장은 취하지 않고자 한다. 또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원시, 부파, 대승을 모두 불교의 이름 하에 통합하여 가는가를 보고자 한다.방법으로서는, 첫째, 원시불교의 근본입장으로서 석존의 사상을 소개하고, 둘째, 이러한 석존의 가르침이 그 이후에 어떤 식으로 인간존재의 길을 형성해 가는가를 보고자 한다.


2. 원시불교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 와쓰지 테쓰로, 안승준 역, 1993, 불교 시대사. 和辻哲郞(1889-1960)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윤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그의 대표적 저서로서는 ꡔ倫理學ꡕ(昭和12-24年)ꡔ原始佛敎の實踐哲學ꡕ(昭和2年)ꡔ風土ꡕ(昭和10年)ꡔ日本倫理思想史ꡕ(昭和27年)등이 있다.
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원시불교라는 호칭은 주로 팔리어 경장과 율장 그리고 한역 아함 소승율로 알려진 불교를 가리킨다고 정의되어져 있다. 同上、13p
즉 팔리 5부와 한역 4아함경이 일반적으로 석존의 가르침과 초기불교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승인되어져 있다. 시기적으로는 불멸(佛滅) 100년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원시불교라 칭하고 있는 데, 이는 상좌, 대중의 근본분열이 불멸(佛滅) 100년경이라는 것과 아쇼카왕의 즉위가 불멸(佛滅) 100년 후라는 설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아함경이 석존의 가르침과 초기 불교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 또한 아가마라는 이름 그대로 구송으로 전승된 것을 계승 종합한 것인 한, 그것을 석존의 가르침 그 자체로 직결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아함경에 대한 일반적 평가이다. ꡔ바웃드하 불교ꡕ, 나카무라 하지메(中村 元), 慧謜 역, 1990, 김영사
이는 대승불교를 석존의 가르침에 그대로 직결시키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시도인가를 가리킴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가 여전히 불교라고 불려지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재차 묻게 한다. 바꿔 말하면, 불교 내부의 수많은 종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여전히 불교라고 불려질 수 있는 근거, 그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 이 장의 목적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초기 불교 경전, 즉 아함경이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문제가 무었이며, 또한 이 문제는 어떤 식으로 해결되어져 갔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답하고자 한다.
먼저 불교사상 하면 제일 많이 회자되는 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며, 또한 고집멸도(苦集滅道)이다. ꡔ담마빠따ꡕ(277-279)(이하, Dhp이라 표기)에는 「諸行無常, 一切皆苦, 諸法非我」를 뜻하는 구절이 설해져 있다.
4고8고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존재의 삶(苦)의 인식과 그러한 괴로움을 있게 하는 삶의 생멸변천(無常)의 인식, 더 나아가서는 집착의 부정으로서의 무아(無我)의 인식이 말하자면 위와 같은 정형구로 정착되어졌다 보여진다. 또한 이와 같은 사상이 아함경 속에 수도 없이 반복된다는 사실 및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이와 같은 사상을 불교의 근본사상으로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불교 내부의 수많은 종파의 사상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이 여전히 불교로서 통합되어질수 있는 까닭이 바로 무상-고-무아라는 뿌리의 공통에 있음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성립시키는 무상-고-무아란 과연 어떠한 사상이었을까. 여기서는 먼저 ꡐ무상ꡑ이라는 말의 고찰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1) 무 상

무상을 고찰의 출발점에 두는 것은, 무상이 불교만의 특유한 개념이 아닌 다른 사상 체계 내에서도 빈번히 물어지는 개념이며, 또한 무상에 대한 무상감(無常感)은 석가의 가르침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보편적인 고통(苦)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흔히 생노병사라는 삶의 사실이 불러 일으키는 무상의 감각은 우리의 현실저변에서 경험되는 인간존재의 근원적 고통이자 또한 유한한 존재로서 자기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근본체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대표적 예로서 석존의 출가 동기를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개념으로서의 무상은 과연 이와 같은 삶의 보편적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무상을 통해 불교의 근본사상을 파악하고, 또한 그럼으로써 불교 속에 나타난 인간존재의 길을 명확히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 한, 여기서는 우선 타 사상과 구별되는 불교의 독자적 개념으로서의 무상의 의의가 먼저 명확히 해명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수따니빠따ꡕ의 경우를 보기로 한다.

「태어난 자는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언젠가는 늙어 죽는다. 실로 살아 있는 자의 운명은 이와 같은 것이다.」 ꡔ숫따니빠따ꡕ(575) (이하, Sn이라 표기)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현자나 우자나, 모두 죽음에 굴복한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 Sn(578)


「세계는 어느 한 곳도 견고하지 못하다. 나는 자신이 의지해야만 할 곳을 찾았는데 이미 죽음, 고통 등에 둘러싸이지 않은 곳을 나는 볼 수가 없었다.」 Sn(937)


여기에는 분명 늙고 병들고 죽어 가는 존재로서의 인간, 즉 자신의 원망과는 상관없이 태어나서 죽어 가는 인간존재의 적나라한 현실과 그 현실이 성립하는 장소로서의 세상이, 모두 무상을 보여주는 객관적 사실로서 설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이 사실 우리에게는  무상감(無常感)을 접하는 근원적 장소가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생성소멸해가는 현실, 가장 근원적으로는 죽어가는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인식이 무상을 보게하는 직접적 계기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무상을 원치 않는 곳에 우리의 무상감이 이미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의 출가의 동기가 보여주듯 석존의 가르침으로서의 ꡐ무상ꡑ은 분명 이와 같은 현실존재로서의 자신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석존의 가르침으로서의 무상이 이와 같은 것이었다면 이는 인간존재의 보편적 체험이자 객관적 사실로서의 무상에 대한 일반적인 주목일 뿐, 불교를 타 사상과 구별하는 불교의 중심 축으로서의 무상일 수는 없게 된다. 이는 석존이 설한 무상을 되묻는 이유가, 석가가 설한 ꡐ무상ꡑ이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존재 체험을 기점으로 함과 동시에 우리의 무상, 구체적으로는 무상감(無常感)을 뛰어 넘는 인간이 보아야 할 진리로서의 무상관(無常觀)의 명확한 제시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석가가 설한 ꡐ무상ꡑ은 과연 어떠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걸까? 숫타니파타 뿐만 아니라 잡아함 등등의 초기 경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반복적으로 설해져 있다.

「색수상행식은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고이다. 고인 것은 자아가 아니고, 자아가 아닌 것은 자아의 것도 아니다.」 雜阿含經卷第一,九(大正新修大藏經刊行會(이하 大正藏이라 표기),2p): 「色無常.無常卽苦.苦卽非我.非我者亦非我所.如是觀者.名眞實正觀.如是受想行識無常.無常卽苦.苦卽非我.非我者亦非我所.如是觀者.名眞實觀.聖弟子.如是觀者.厭於色.厭受想行識.厭故不樂.不樂故得解脫.解脫者眞實智生.…」 雜阿含經卷第三,六十三(大正藏,16p):若沙門婆羅門計有我.一切皆於比五受陰計有我.


전술한 바와 같이 무상과 고 더 나아가서는 무아와 고를 동일시하는 입장이 꼭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면, 이 구절은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바꿔 말하면 이 구절이 분명 함축하고 있을 불교의 독자적 개념으로서의 무상의 의의, 그것을 명확히 하는것이 우리의 과제인데, 우선 이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여기서 설해지는 무상(無常)이 상(常)의 대립항으로서의 무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석존의 침묵의 입장(無記)에서도 예측할 수 있듯이, 여기서 설해지는 무상은 분명 우리의 현실 존재에서 볼 수 있는, 예를 들면 오온 등의 존재자의 존재하는 방식(법)과 연관되어 논해지고 있다. 불교의 무상이 이와 같이 결코 우리의 경험적 고를 직접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점, 즉 무상이 설해질 때는 반드시 오온 혹은 육입처의 인식과 함께 경전에 설해지고 있다는 점이 첫째로 주목되어져야 할 점이다.
두 번째로는 「ꡐ색수상행식은 무상이고 고이고 무아ꡑ라고 말한다든지, 또한 ꡐ안이비설신의는 무상, 고, 무아ꡑ라고 한다든지, 이러한 오래된 경에는 반드시 그 후에 일련의 문구가 따른다. 그 중 가장 간단한 것은 ꡐ이와 같은 깨달음은 진실의 인식이라 명명할 수 있다. 성제자가 이와 같이 깨달으면 색수상행식에서(혹은 안이비설신의에서) 해탈한다ꡑ이다」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 162p
라는 와쯔지의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잡아함에는 「一切無常。何等法無常。謂眼無常....」과 「색등이 무상이라는 것은 범부는 알지 못하는 단지 성제자만이 보는 진리」라는 표현이 보인다. 雜阿含經200, 주 8참조

즉 불교의 무상이 단순한 객관적 사실, 혹은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적 사실의 단계를 넘어서서 인간존재의 진실에 대한 인식으로서 이해되어져 있다는 점이 주목될 필요가 있다. 무상이란 성제자 만이 보는 진리라는 표현은 바로 무상의 이와 같은 측면에 착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법으로서의 무상에 관한 구절은, Sn(806,809)에 잘 드러나 있다.예를 들면, Sn(809)에는 집착에서 무상감이 생기는 것이 지적되고, 따라서 성자는 소유를 버림이 지적되고 있다. 그 외에도 Dhp(277)등이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진리로서의 무상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와쓰지의 지적에 의하면, 불교의 무상이란 시간적으로 국한(유한)되어졌다는 의미가 아닌 모든 것이 시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 즉  존재자의 존재의 방식이 바로 시간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비애의 감정을 수반하는 범부의 입장의 무상, 더 나아가서는 죽음(유한)이라는 객관적 사실의 무상을 넘어서서, 색 등의 존재자의 존재의 방식이 바로 시간적이라는 인간존재의 진상에 대한 인식이, 말하자면 불교의 개념으로서의 무상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ꡐ무상ꡑ이 이와 같이 이해될 때, 무상고(無常苦) 혹은 무아(無我)가 불교사상에 있어서 어떻게 이해되어지고 또 전개되어져 가는가를 우리는 예측할 수 있게 된다. 「무아 연기의 입장에서는 고수(苦受)와 낙수(樂受)는 모두 무상한 존재의 법으로써 열반을 낙(樂)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고수에 대한 낙수가 아니라 무상, 계박 등과 같은 뜻인 고(苦)의 소멸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의 고(苦)의 멸(滅)은 자연적 입장에 있어서의 모든 존재의 멸이며 따라서 모든 제약을 벗어난 절대적인 자유로서 단순히 개인적으로 경험적인 고통을 멸했다는 상태와는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즉 자타고락(自他苦樂)의 구별이 없는 존재의 멸에서는 결코 이기적, 개인적 행복이 생각될 수 없으며 이를 근거로 하여 와쯔지는  고(苦)로부터의 해탈의 요구를 단순히 이기적, 개인적 추구로 보는 왈레제의 해석을 오류라고 지적한다. 즉 초개인적으로 실현되는 무상,고의 세계의 극복, 이것이 불교가 인간도덕의 길인 까닭이며, 실제 와쯔지는 아쇼카왕의 비문을 통해 무아의 입장이 멸의 도로서 분명히 도덕을 건립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을 바로 대승의 보살에서 보고 있다.」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253p)요약
또한 무상의 인식이 어떻게 인간존재의 길을 여는가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석가의 설법과 보살의 자비의 행은 바로 그러한 전형적 예라 할 수 있는데, 우선 여기에서는 무상의 입장이 어떻게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으로 연결되어져 가는가를 확인함으로써 무상, 고, 무아의 인식이 어떻게 불교를 실천철학으로 건립시켜 가는가를 보고자 한다.

2) 무 아

ꡔ테리가타ꡕ에는 「인(因)으로부터 생겨 파멸하는 각각의 형성된 것을 아트만과는 다른 것으로 보고 나는 모든 번뇌를 버렸다. 나는 청정과 숙정 속에 들어 갔다」 Therigatha(101). 그 이외도 Theragatha(1160)에는 오온의 구성요소를 아트만과 다른 것으로 보는 것, 즉 아트만이라 보지 않는다는 구절등이 보인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장아함경, 중아함경에서는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에 귀의하며, 법을 등불로 삼고, 법에 귀의하라」 ꡔ自我と無我ꡕ(中村元, 1981, 平樂寺書店)에 수록된 논문인「無我と主體」(平川彰) 참조. 그는 불교에서 인정되고 있는 아(我)의 예로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이 아함경 중 ꡔ大般涅槃經ꡕ에 설해진「자기를 등불로 하고, 자기를 귀의처로 하라. 법을 ……。」라는 석존이 임종 때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임을 지적한다. 또한 ꡔ長阿含經ꡕ 卷二(大正藏一,15p) ꡔ中阿含經ꡕ 卷一五(大正藏一,520p)에도 이와 같은 표현이 있고 단ꡔ雜阿含經ꡕ 卷二(大正藏二,89p)에는 이것이 自洲라 표현되어져 있다고 논해져 있다.
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설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이상학적 존재 혹은 경험적 존재로서의 나는 아니라 할지라도, 여기엔 여전히 법을 보고 실행하는 존재로서의 ‘ 나’가 인정되어져 있음이 보인다. 특히 우리는 ꡔ수따니빠따ꡕ의 「코뿔소의 뿔처럼 오로지 홀로 걸어가라」 Sn(35-75), 특히 무아설에 관해서는 Sn(1032-1123)이 주목할 만 하다.
라는 반복구와, ꡔ담마빠다ꡕ의 「자기야말로 자기의 주인이며 자기야말로 자기가 의지할 곳이다」 Dhp(380)에도 「실로 자기는 자신의 주인이다. 자기는 자기가 돌아갈 곳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라는 구절을 통해 초기 불교가 얼마나 진정한 자기의 추구를 목표로 했는가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해지고 있는 진정한 자기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무상의 고찰은 여기서 구해지는 진정한 자기가, 우선 색수상행식이 무상임을 아는 존재이며, 또한 이렇게 봄으로써 색수상행식에서 해탈하는 존재임을 시사하고 있다. 즉 ꡔ수따니빠따ꡕ, ꡔ담마빠다ꡕ에 등장하는 자기란 단순한 일상적 차원의 나가 아님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차원의 나 역시 아닌 실천적 인식의 주인으로서의 나 임이 먼저 주목될 필요가 있다. 이는 불교의 무아 개념이 무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문제와는 상관없는 현실존재의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무아를 뜻하며, 또한 이러한 존재방식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에 집착하는 데에 일체중생의 고가 있음을 가리키는 인식이며,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인식이기 때문에 동시에 일체중생의 무상고의 멸을 지향하는 실천적 인식임을 가리킨다. 즉 원시불교사상이 보여 주는 무아 사상은 번뇌, 집착 덩어리로서의 자신의 발견임과 동시에 이러한 관(觀)이 또한 불교의 개념으로서의 무상과 무상고를 보고 멸하는 실천적 주체의 발견임이 여기서 주목되면 충분하다. 불교의 중심과제가 이와 같이 진정한 자기를 구하는 해탈의 길인 한, 우리가 석가의 중심과제를 인간존재에서 찾는 것은, 석가의 본의(本意)에 따르는 길이 된다.


3. 인간존재의 길

1) 연 기

제1장에서는 범부의 무상감(無常感)이 어떻게 석가의 무상관(無常觀) 속으로 총합 혹은 지양되어져 가는가를 무상, 고, 무아라는 불교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논했다. 즉 생노병사라는 탄식조로 흔히 표현되는 인간 혹은 세간의 무상을 보다 근원적 차원에서 근거지우는 무상이 바로 석가의 설법으로서의 무상이며, 이와 같은 이중의 무상이 있는 그대로 직시되는 곳에 바로 불교의 무상, 더 나아가서는 무아를 실천하는 길이 열림을 논해 왔다. 원시불교 이후의 불교 내부의 사상적 전개가 왜 그 내용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교이며 또한 불교의 사상적 체계의 발전일 수 있는가를 말하자면 무상-고-무아라는 뿌리의 공동에 착안하여 논한 것이 제1장의 주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색 등의 법의 무상을 보는 것, 이것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보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 이렇게 묻는 것은 원시불교 이후의 불교사상사가 무상, 고, 무아를 불교의 근본입장으로 확고히 내세움과 동시에 또한 그에 반하여 이와 같은 법의 개념을 둘러싼 상반된 견해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젠베르그, 체르바스키 등등은 불교 철학의 체계를 법론(法論)으로 해석한 대표적 학자이다. Otto Rosenberg, Die Probleme Buddhistischen Philosophie, 1924; Th.Stcherbatsky, The Central Conception of Buddhism and the Meaning of the Word Dharma, 1923; ꡔ人格と人類性ꡕ 「佛敎哲學における法の槪念と辯證法」(和辻哲郞全集九卷)의 주 인용
오온, 육입, 연기 등의 법의 체계 및 유부, 중관 철학의 입장이 보여주는 법유(法有), 법공(法空)의 사상, 여기에 등장하는 ‘ 법’의 개념에 주목한 것이 바로 이들의 입장이었다. 이처럼 불교가 법의 철학이라는 측면에 주목해 보면, 불교사상사가 보여주는 법의 무상에 대한 물음, 구체적으로는 법유(法有), 법공(法空)사상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은 법의 체계에 대한 물음은 어쩌면 당연한 사상사적 전개였다고 보여 진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불교의 ‘ 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본 논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논자가 박사논문에서 다루었던 와쓰지의 사상적 입장을 소개하면서 논해 가고자 한다. 와쓰지의 경우를 보면 법의 개념은 이미 법유(法有), 법공(法空)의 문제가 생기기 이전에 성립된 오래된 개념이며, 또한 법의 유(有), 공(空)의 문제는 법의 체계가 성립된 후 법의 본질에 대한 반성으로 일어난 것임이 지적되고 있다. ꡔ人格と人類性ꡕ 「佛敎哲學における法の槪念と辯證法」(和辻哲郞全集九卷,466p)
이러한 입장은 유부, 중관철학이 법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입장임을 시사함과 동시에 불교의 ‘ 법’의 문제가 또한 원시불교의 근본 입장의 확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해명 가능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시불교에서 ‘ 법’의 문제를 주제로 다룬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도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라는 구절은 실로 원시불교에서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기의 기본사상을 드러내는 정형구로 인정되어져 있다. 하지만 이 문구의 해석 여부에 따라 각 파의 설이 차이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부파불교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던 유부의 시간적 생기 관계로서의 연기 해석은 중관파의 법의 상의성에 주목한 연기설과 비교하면 그 차는 명백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한 연기 해석을 원시불교의 입장에 충실한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이러한 연기 사상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나까무라 하지메의 경우는 「연기를 불생으로 해석하는 사상은 초기의 불교에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 부처님은 괴로움, 고락 또는 십이지의 하나하나에 대해 그것은 스스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며, 자작이면서 타작인 것도 아니며, 자작도 아니고 타작도 아닌 무인생의 것도 아닌, 실로 연기한 것에 다름아니라고 설했다고 한다. 따라서 연기가 시간적 생기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이 초기의 불교에서 유래하는 점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중론은 분명히 이 문제를 다룬 것이다.」(ꡔ용수의 삶과 사상ꡕ, 146p, 1993, 이 재호역, 불교시대사)라는 입장에 입각하여  연기를 법과 법의 관계에 주목한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의 의의로 보고 있다. 즉  부파불교, 특히 유부의 법유(法有)의 사상과 시간적 생기관계로 파악된 연기사상이 용수의 공의 사상에 의해 부정되는 과정을 원시 불교사상의 충실한 계승이라 평가하며, 또한 불교학 내부의 평가를 참고하여 상의상관을 뜻하는 연기야말로 바로 석가가 설한 무상, 고, 무아의 의미임을 인정하는 입장이 표명되어져 있다.
와쯔지의 경우를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원시불교, 유부, 중관파에 드러난 법의 체계의 역사적 발전의 측면을 고려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러한 고찰을 통해 역으로 원시불교의 본래의 뜻을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다.
먼저 그는 연기설에 관한 전통적 해석이 왜 오류인가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지적하고 있다. 첫째로는, 연기설이 원시불교의 근본적 입장에 속한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못한 점, 즉 법의 영역에서 조건 성립의 관계로서 구할 수 있었던 연을 시간적 존재인 세계에서의 인과 관계와 혼동한 점이 지적되고 있다. 둘째로는, 경전에 설해진 것이 상호간에 아무리 모순되어 있더라도, 그것을 한 사람의 조사의 사상으로 조화시켜 나가려는 경향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 177-178p
(177-178)
그렇다면 와쓰지에게 있어 연기사상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가? 그의 대표적 저서의 하나인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에는 연기설의 가장 큰 의의가 바로 법과 법의 조건관계의 철저화에 구해져 있다. 와쓰지는 우이 하쿠주우의 입장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인정함으로서, 연기설이 과연 어떠한 측면에서 해석되어야 하는가에 답하고 있다. 「우이 하쿠주우는 12인연의 의의를 경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주석 속에서 찿고, 그것이 범부의 것으로서의 인생의 진상을, 즉 ‘ 인생 생존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를 설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인생 생존이 어떻게 발생되어 왔는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12지는 원인 결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결과의 관계를 따라서 열거한 것이다.…연기설은 ‘ 세계의 사물은 모두 상의 상관 관계에서 성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사상으로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와 완전히 동일한 사상이다. 이와 같이 우이 하쿠주우는 연기가 이론적 관계인 것을 역설하는 점에서 왈레제, 마쓰모토 씨와 완전히 동일한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同上, 175p. 최근의 불교연구저서에는 연기의 해석이 상의 상관 관계로써 논해져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대표적 학자로서는 우이 하쿠주우(宇井伯壽、ꡔ印度哲學硏究ꡕ第二卷), 와쯔지 테쯔로(和辻哲郞、ꡔ原始佛敎の實踐哲學ꡕ全集五卷) 등등이 있고, 특히 ꡔ佛敎思想の諸問題ー平川 彰博士古稀記念論集ꡕ(昭和60、春秋社)에는 연기, 공, 중도 등등의 사상이 주제별로 잘 논해져 있다.
예를 들면 일체무상, 오온, 육입, 연기 등등의 체계는 ‘ 존재하는 것’의 법과 법 사이의 의존관계를 파악하는 과정의 심화로서 이해되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의 최대의 관문으로서 다른 법과 법 사이에는 보이는 논리적 의존관계가 ‘ 행(行)과 무명(無明)’의 관계에서는 보이지 않음이 지적되고 있다. 이는 행(行)의 의미를 아무리 파헤쳐도 그 근저에 부지(不知) 혹은 자연적 입장을 의미하는 무명(無明)이 안 나온다는 점, 즉 무명의 개념을 필요로 한 궁극의 근거가 없다는 점이 그에게 주목되었음을 의미한다. 무명을 필요로 한 근본 동기, 더 나아가서는 무명의 멸(滅)이 왜 필연적으로 행(行)의 멸을 이끄는가에 대한 궁극적 근거의 결핍이 최종적으로는 연기설의 최대의 난점으로 집약되어졌다 보여 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기설의 최대의 난점인 논리적 불철저의 철저화가 용수의 무자성공의 입장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보는 곳에 우리는 와쓰지의 불교사상사를 보는 독특한 시각을 이해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무명의 개념을 필요로 한 근본 동기, 즉 ‘ 궁극의 근거는 없다’라고 하는 연기설에 남겨진 논리적 인식의 불철저성이 바로 반야경과 용수의 중심문제라고 보는 곳에, 우리는 불교사상사 내부의 사상사적 발전을 인정하는 와쓰지의 독자적 입장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와쓰지의 불교사상이해를 고찰함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측면은, 와쓰지의 ‘ 공’에의 관심이 단순히 연기설에 남겨진 논리적 불철저성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와쓰지의 원시불교사상에 대한 최대의 불만은 역으로 왜 범부(凡夫)인 우리에게도 해탈에의 요구, 바꿔 말하면 내 존재의 근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이 입장에서는 답해지지 않고 있다는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오온, 육입, 연기 등등의 법에서는 자연적 입장을 부정하고 지양하려는 법은 나오지 않는다. 즉 법을 보는 것이 왜 동시에 법을 멸하는 길이 되는가에 대한 답은 이러한 법을 보는 것 만으로는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멸에의 길을 희구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분명, 원시불교사상이 보여주는 멸에의 길은 길을 걷는 자로서의 석존이 전형적 모델이 되어 있다. Sn(934)참조 바람
즉 석존의 권위가 논리적 근거를 넘어서서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의 전형으로 위치하는 곳에 와쓰지는 원시불교의 철학적 입장의 최대 약점을 보고 있다. 이는 와쓰지의 원시불교 이후의 불교 사상사 연구가 석존의 권위를 대신하는 논리적 근거의 제시 혹은 석존의 권위가 힘을 갖는 근거를 제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져 갈 것을 예상하게 한다. 또한 와쓰지의 ‘ 공’에 대한 관심이 바로 이와 같은 동기와 결탁되어져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이와 같은 와쓰지의 연기와 공사상의 고찰을 통해 ‘ 법’의 문제가 존재자의 존재의 범주의 문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닌 법과 법 사이의 관계를 추구하는 문제로 심화되어져 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법과 법의 관계를 조건성립관계로 파악한 연기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 중, 법이 생하기 위한 조건을 묻는 순관 보다, 법이 멸하기 위한 조건을 묻는 역관이 와쓰지의 중심과제로서 부상되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역관이 논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곳에 자연적 입장을 멸하는 길로서 원시불교의 도덕의 입장이 건립되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순관은 인간학적 인식을 내포하는 것이며, 역관은 도덕을 건립하는 입장이라는 와쓰지의 주장은, 바로 원시불교사상이 연기의 역관을 통해 멸의 길로서 도덕을 건립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 250p. 「실로 마음이 통일되어 있으면 풍부한 지혜가 생긴다. 실로 마음이 통일되어져 있지 않으면 풍부한 지혜는 멸한다. 생하는 것과 멸하는 것, 이 두 종류의 길을 알고 풍부한 지혜가 생기도록 자신을 챙겨라.」Dhp(282). 또한 용수의 ꡔ중론ꡕ(26,11)에도 「무명이 멸했을 때, 모든 형성된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명이 멸하는 것은 지(知)에 의해 저 (12인연의) 수행으로부터 온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ꡔ중론ꡕ의 인용의 경우, ꡔ용수의 삶과 사상ꡕ에 번역되어져 있는 찬드라카르티의 주석 「프라산나파타」를 인용한다.)

이와 같은 고찰은 법과 법의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추구한 연기설 자체 내의 사상적 발전이, 법이란 자성(自性)을 갖지 않는 무자성공(無自性空)이며, 또한 이것은 결코 우리의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실상공(實相空)이라는 전개를 낳았음을 보여 준다. 「‘부정하게 집착된 것은 허망이다’라고 세존은 설하셨다. 그리고 모든 형성된 것은 망취법(妄取法)이다. 그러므로 온갖 형성된 것은 허망이다. 만일 이 망취된 것이 허망이라면 거기에서는 무엇이 망취되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존사가 설했는데, 그것은 공을 천명하는 것이다. 온갖 것에 있어서 그 자체가 없는 것(無自性)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自性)를 지니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갖 것에 공이 존재하기 때문에」ꡔ중론ꡕ(13,1-3); 「어떤 연기라도 이를 우리들은 공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임시로 설정된 것으로 중도이다.」(同上,24,18). 그 외에도 23,14-15 등등이 있다.
진정한 무집착의 세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현실 속에서 실천해 가야 하는 길임을 명확히 제시하는 논리, 이것이 바로 법의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연기사상이었으며 공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무상, 고, 무아 라는 법을 연기를 통해 명확히 봄으로써, 진정한 무집착의 세계를 바로 이 세상 속에서 실천해 간 존재로서 석존과 보살의 존재에 접하게 된다.

2) 보 살

이상의 고찰은 불교사상이 보여주는 사상사적 발전을 무상, 고, 무아라는 법의 인식과, 법과 법의 관계를 묻는 연기에 주목하여 논함으로써 원시불교의 무집착의 입장 Sn(1119)에는 「언제나 마음에 염해서 무언가를 아트만이라 집착하는 견해를 버리고 세간을 공이라 관찰하라.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것이다」라고 설해져 있다. 또한 Sn11-13(뱀의 장)에는 일체의 것이 허망임을 알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버리라고 설해져 있다.
이야말로 법공(法空)의 진정한 의미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즉 상관관계로서의 연기해석을 토대로 하여 현실의 존재자의 존재의 양태로서의 무상이 또한 그 자신 무자성공임을 명확히 하고, 이러한 무자성공의 실천적 전형으로서 바로 석가와 보살이라는 존재가 등장함을 보아왔다.
그렇다면 인간존재가 걸어야 할 길의 전형적 존재로서 등장하고 있는 석가, 보살은 와쓰지 자신에게 있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먼저 그의 사상의 특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사상, 예술, 문학, 종교 등등을 문화사적 측면에서 고찰함과 동시에 그 속에 드러난 인간존재의 양태를 인간존재의 길이 실현되는 하나의 표현으로서 취급하고 있다. 그의 주저인 ꡔ윤리학ꡕ ꡔ倫理學ꡕ(和辻哲郞全集十,十一卷),昭和12-24年.
은 바로 그러한 관점에 입각한 저서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ꡔ윤리학ꡕ을 지탱하는 양 축 중 하나가 바로 ꡔ원시불교의 실천철학ꡕ의 단계에서 구축되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나를 세우는 게 아닌 무아의 입장에서의 공의 실천, 바꿔 말하면, 불교의 자비의 행(行)의 현출에서, 와쓰지는 개인이 아닌 인간존재 전체를 포함할 수 있는 인간의 길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능성은 실은 이미 와쓰지가 용수의 공사상에 주목한 단계에서부터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연기가 자성을 가진 법이라면, 모든 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라는 연기법 그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 연기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연기법 자신도 조건지워진 법이며 따라서 자성을 갖지 않는 무(無)이여야 한다. …유(有)이라면 이 개념은 성립하지 못한다.」 ꡔ佛敎倫理思想史ꡕ(和辻哲郞全集一九卷), 310p,大正14年講義


이 인용문에는 왜 법이 무자성공일 수 밖에 없는가가 연기법 자체의 고찰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 있다. 용수 ꡔ중론ꡕ 제1장에는 특히 연기를 중심으로 하여 설해져 있다. 「모든 사물은 어디에서도, 어떤 것이라도, 자체로부터도, 다른 것으로부터도, 자타의 양자로부터도, 또 원인 없이 생긴 것(無因性)도 존재하지 않는다.」(1,1); 「그 자체가 없는 사물(有)에게는 일반적으로 있는 것(有性)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1,10)
연기법이 무(無)를 근거로 하여서만 성립한다고 하는 것은 첫째, 행(行)부터 시작하는 연기하는 법의 무자성공을 보는 것이 바로 명(明)의 입장이며, 둘째, 이러한 명(明)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무명의 영역이 우리에게 알려짐과 동시에 멸해짐을 의미하고있다. 연기를 보는 명(明), 즉 반야(般若)는 말하자면 바로 이와 같은 연기의 양관(순관,역관)을 제불(諸佛)의 길(道)로서 보는 것이며, 그러기에 법을 분별하는 지(智)임과 동시에 그 법을 멸하는 실천적 인식이었다 할 수 있다. 결국 여기에는 무명을 보는 것이 왜 동시에 무명을 멸하는 길이 되는가에 대한 가능성이 멸로서의 공(무자성공)을 근거로 하여 해결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 23참조, 그 외에도 「이와 같이 전도가 멸하기 때문에 무지(無明)도 멸한다. 무명이 멸할 때에 형성력(行)등도 멸한다.」同上(23,23) 등등이 있다.
바꿔 말하면 무명이라는 법을 봄과 동시에 멸하는 작용으로서의 반야는 법의 근거가 멸(공)이라는 논리적 근거를 얻음으로써 비로소 반야에 의한 무명의 부정이 왜 단순한 멸이 아닌 법 자신의 근원으로의 회귀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얻게 된다. 또한 범부가 가지는 해탈의 요구, 바꿔 말하면, 왜 모든 인간존재가 불(彿)에의 귀의 가능성을 가지는가의 문제 역시 인간존재의 실상(實相)인 공에 의해 그 논리적 가능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불교사상을 통해 인간존재로서 걸어야 할 길을 보고자 하는 것은, 범부인 우리에게 논리적 가능성으로 주어진 해탈의 확보, 더 나아가서는 해탈을 요구하는 마음이 생긴 이후의 논리적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여기서 직접 물어져야 하는 것은 현실존재인 우리를 어떤 방식이든 인간존재의 길로 이끄는 근원적인 힘, 즉 석존 및 보살의 존재일 필요가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논리적 근거지움의 매개없이도 해탈의 요구를 우리에게 불러 일으키는 존재로서의 석존과의 만남, 구체적으로는 ‘ 석존, 보살, 승’이라는 현실존재의 의미가 물어질 필요가 있다. 즉 일상적 존재인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존재의 길을 실현하는 존재의 의미가 마지막으로 확인 될 필요가 있다.
와쓰지의 불교사상연구에는 ‘ 공’의 체현자인 석존이라 할 지라도 이 존재가 진정한 무차별의 현실태이기 위해서는 무차별을 원하는 자비의 마음과 또한 그러한 행이 수반되어야 함이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와쓰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자비가 불교의 근본입장이라는 점에 의문을 제기 할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어떤 행(行)이 자비인가라고 되물으면 결국 무집착으로서의 무아의 실천, 혹은 공의 실천이라는 불교의 정형구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자비를 어떻게 자비로서 알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자비가 성립하는 장을 통해서, 바꿔 말하면, 어떤 행이 우리의 일상에서 자비의 행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는 가를 통해서 역으로 자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물음은 공의 실천이 진정한 공의 실천일 수 있기 위해서는 석존의 행(行)을 자비로서 받아들이는 범부, 구체적으로는 석존의 행(行)을 보고 감동하는 중생이라는 또 다른 축이 필요하다는 전개를 예상하게 한다. 더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이 자신을 중생으로 자각하고 자비의 행을 인간존재의 길로서 실천할 때까지 이러한 자비의 행은 보살의 서원(誓願)이 보여주 듯무한진행을 자신의 운명으로 요구받게 된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상호관계성 속에서 처음으로 자비는 인간존재가 걸어야 할 덕목으로 승인되어져 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관점은 범부의 해탈을 향한 요구, 혹은 사모가 설명되어지는 것 역시 자비가 성립하는 인간관계의 장을 필요로 함을 시사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비의 행이 성립가능한 조건은 무아의 실천과 이러한 실천에 대한 감동의 일치에 있다고도 표현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계의 장을 토대로 하여 일체중생의 무상고의 멸을 실천해가는 인간존재의 길의 대표적 전형이 바로 석존이며 보살임을 아는 곳에 또한 그들의 길을 사모하는 우리의 삶의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닐까.
「불교 속에 드러난 인간존재의 길」을 읽고서


최 정 규(증상도사상연구소).

  불교를 읽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불교가 오랜세월 동안 현실 속에 살아있었고 현재 숨쉬고 있는 종교사상이라고 하는 점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불교학의 성립근거도 여기에 있다.
  논고의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논고는 불교의 여러 측면 가운데 ‘실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방대한 내용을 핵심을 짚어냄으로써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평소 논자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만 논자가 너무 넓은 범위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의문점을 노출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같이 어려운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세세한 부분은 접어두고 몇가지 의문사항을 사족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서론의 마지막 문단이 무슨 뜻인지 설명이 필요하리라 본다. 이 문단의 의미는 본고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알고 싶다. 이러한 의문은 논자의 불교에 대한 정의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음으로 논자는 논의 전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와쓰지 테스로라는 특정 학자의 입장에 따르고 있는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와쓰지의 관점과 논자의 입장이 어떻게 구분될 수 있으며 논자의 독특한 주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불교를 불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상, 고, 무아 그리고 연기설에 있다. 까닭에 후대에 무상, 고, 무아를 3법인이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논자는 ‘(1)무상’을 논하면서 ‘무상과 고 더 나아가서는 무아와 고를 동일시하는 입장이 꼭 불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또한 ‘무아’는 사상사적인 맥락에서 복잡하고 중요한 맥락을 갖는 용어이다. 그리고 무아개념은 연기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너무나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인용문에서  ‘나’ 혹은 ‘스스로’라고 표기된 용어가 5부 니까야의 원문에서도 동일한가 하는 점이 궁금하다.
  끝으로 논자가 표방하고 있는 ‘자비행’의 이론적 근거가 무엇인지 간략한 설명을 바란다. 모든 것이 무상이고, 무아이고, 고라면 어떻게 자비행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불교가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비행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인가? 논자의 논지에 따른 일목요연한 설명을 바란다.

  사유를 계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논자에게 감사한다.




칸트 철학의 개괄적 소개
헤겔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동일자'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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